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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로 빛나는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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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42

있어야 할 게 없고, 없어야 할 게 있을 때 — 마크 피셔 『기이한 것과 으스스한 것』 요즘 밤늦게 동네를 걷다가 무인매장이나 키오스크만 켜져 있는 가게 앞을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분명 조명도 켜져 있고 물건도 가득 진열돼 있는데,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순간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 저만 느끼는 건 아닐 겁니다. 반대로 어떤 날은, 아무도 없어야 할 자리에 뭔가가 '있다'는 느낌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있어야 할 게 없는 느낌과, 없어야 할 게 있는 느낌은 사실 전혀 다른 종류의 섬뜩함입니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마크 피셔는 이 두 가지를 각각 '으스스한 것(the eerie)'과 '기이한 것(the weird)'이라 부르고 그 둘을 실마리로 우리 삶을 실제로 움직이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해 묻습니다.뭔가 잘못됐다는 느낌, 기이한 것피셔는 기이한 것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2026. 11. 2.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그 말, 누구에게 유리했을까 —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 "능력만 있으면 누구든 성공할 수 있다." 저도 꽤 오랫동안 이 말을 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노력한 사람이 보상받는 게 당연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했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토머스 프랭크의 『민주당의 착각과 오만』을 읽으면서 제가 믿어 온 그 "공정함"이 누군가에게는 아주 편리한 핑계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이 책은 미국 민주당 이야기입니다. 1970년대부터 지금까지, 노동자와 서민을 대변하겠다던 정당이 어떻게 변호사와 금융인, 명문대 졸업생들의 정당으로 바뀌어 갔는지를 추적합니다. 저는 책을 읽으며 굳이 한국의 특정 정당이나 인물을 떠올리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 책이 정말로 묻고 있는 질문에 머물러 보았습니다.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왜 가난한 사람을 구하지 못했.. 2026. 11. 2.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호주제가 사라진 걸 당연하게만 여겼다면 등본을 뗄 때마다 제 이름이 가장 위에, 제가 세대주로 적혀 있는 걸 당연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해진 지 사실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혼한 여성이 무조건 남편의 호적에 들어가고 자녀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던 호주제가 폐지된 게 2005년입니다. 저보다 몇 살 많은 분들은 그 제도 안에서 몇 년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최근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으면서 제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중에 처음부터 당연했던 게 거의 없었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사회는 흐른다"는 말이 왜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질까저자는 대학 강의에서 "우리 여성들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당황합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당연히 '없다'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2026. 10. 31.
『열한 계단』, 불편한 책을 읽으라는 채사장의 조언 요즘은 알고리즘이 제가 좋아할 만한 책만 골라서 추천해줍니다. 비슷한 취향의 책을 계속 읽다 보면 마음은 편한데, 가끔은 '나는 늘 같은 자리만 맴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열한 계단』을 펼친 것도 그런 기분이 들던 때였습니다. 채사장이 이 책에서 던지는 조언은 뜻밖에 단순했습니다. 편한 책 대신 불편한 책을 읽으라는 것이었습니다.불편한 책을 읽을 것저자는 사람을 두 종류로 나눕니다. 익숙한 세계를 깊이 파고드는 사람과, 불편한 세계로 계속 건너가는 사람입니다.두 번째는 불편한 책을 선택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책을 읽고 그 세계에 동감하면, 다음에는 그 세계를 무너뜨리는 전혀 다른 세계관의 책을 선택한다. 이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 세계의 지평을 점차 넓혀가는 사람이 있다.저도 제.. 2026. 10. 30.
『죽음의 격차』, 부검대 위에서 20년간 만난 건 '혼자'였다 요즘 뉴스에서 '고독사'라는 말을 꽤 자주 봅니다. 혼자 살다 아무도 모르게 세상을 떠나는 일, 이제는 낯설지 않은 단어가 됐지만 그 뒤에 있는 구체적인 삶까지 들여다볼 일은 많지 않습니다. 『죽음의 격차』는 일본의 법의학자 니시오 하지메가 20년 가까이 부검대 앞에 서서 써낸 책입니다. 그가 밝혀내는 것은 사건의 진상이 아니라 '죽음의 진상'이라고 합니다. 이 사람이 왜 죽었는지를 밝히는 일인데, 그 과정에서 매번 마주하게 되는 건 뜻밖에도 가난과 고립이었습니다.부검대에서 가장 자주 만나는 건 '혼자'였다저자가 몸담은 효고의과대학 법의학 교실에서 부검한 사람들의 통계를 보면 숫자가 분명하게 말해줍니다.우리 법의학 교실에서 부검한 전체 주검의 약 50%가 독거자이며, 약 20%가 생활보호 수급자, 약 1.. 2026. 10. 28.
한비자의 처세학 믿고 맡겼던 사람이 어느 순간 돌변해서 뒤통수를 치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직장에서든 가까운 관계에서든 한 번쯤 겪어보신 일일 겁니다. 2천 년도 더 전에, 전국시대 한나라의 서자 출신 사상가 한비자는 이 질문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사람의 선한 마음을 믿지 말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상황을 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한비자의 처세학』은 그가 남긴 55편의 글 속 일화들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 책입니다.선의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한나라의 소후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관을 관리하는 신하가 추울까 봐 옷을 덮어준 일화가 나옵니다. 소후는 잠에서 깨어 고마워하기는커녕, 옷을 덮어준 신하와 원래 옷을 담당하던 신하.. 2026. 10.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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