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 맡겼던 사람이 어느 순간 돌변해서 뒤통수를 치는 걸 보면, "저 사람이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직장에서든 가까운 관계에서든 한 번쯤 겪어보신 일일 겁니다. 2천 년도 더 전에, 전국시대 한나라의 서자 출신 사상가 한비자는 이 질문을 아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사람의 선한 마음을 믿지 말고 그 사람이 서 있는 자리와 상황을 보라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습니다. 『한비자의 처세학』은 그가 남긴 55편의 글 속 일화들을 오늘의 시선으로 다시 읽어낸 책입니다.

선의보다 중요한 건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
한나라의 소후가 술에 취해 잠들었을 때, 관을 관리하는 신하가 추울까 봐 옷을 덮어준 일화가 나옵니다. 소후는 잠에서 깨어 고마워하기는커녕, 옷을 덮어준 신하와 원래 옷을 담당하던 신하를 둘 다 처벌했습니다. 한비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추위가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의 직무 분야를 침범하는 일에서 오는 폐단이 그 추위에서 오는 고통을 훨씬 능가한다고 소후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들리지만 조직을 운영해본 사람이라면 이 논리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라는 걸 알 겁니다. 작은 선의를 계속 봐주다 보면, 각자의 역할 경계가 흐려지고 결국 질서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교묘한 거짓보다 서툰 진심이 오래 간다
노나라 대신의 신하 진서파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진서파는 대신이 사냥에서 잡은 새끼 사슴을 어미가 울며 따라오는 걸 보고 놓아주었습니다. 그는 명령을 어긴 죄로 쫓겨났지만 석 달 뒤 다시 불려와 대신의 아들을 돌보는 일을 맡게 됩니다. 한비자는 이 대목을 하나의 격언으로 정리합니다.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만 못하다(교묘한 거짓은 서툰 성실만 못하다).
반대 사례로, 임금에게 충성을 보이려 자기 아들을 삶아 바친 장군의 이야기도 함께 나옵니다. 지나치게 완벽하게 보이려는 충성은 오히려 의심을 사고, 서툴러도 진심이 드러나는 행동이 끝까지 신뢰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똑같은 행동인데 왜 어제는 칭찬받고 오늘은 벌을 받을까
위나라 영공의 총애를 받던 미자하의 이야기가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그는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허락 없이 임금의 수레를 탔고 임금은 그 효심을 칭찬했습니다. 또 한 번은 자기가 먹던 복숭아를 임금에게 권했는데, 임금은 그 마음을 기특해했습니다. 그런데 미자하의 미모가 시들고 총애가 사라지자, 임금은 같은 두 가지 일을 들어 그를 문책했습니다. 한비자는 이렇게 씁니다.
미자하의 행동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동일한 행동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에는 칭찬을 받은 이유가 그대로 문책을 받는 이유로 변하고 말았다.
저는 이 대목에서 회사 생활이 떠올랐습니다. 평가가 좋을 때는 과감한 행동이 '추진력'으로 불리다가, 평가가 나빠지면 똑같은 행동이 '독단'으로 불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행동이 변한 게 아니라, 그 행동을 바라보는 사람의 애증이 변한 겁니다.
선의는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 뒤집힌다
한비자가 인간관계를 이렇게 냉정하게 본 이유는, 선의라는 감정 자체가 오래 지속되는 성질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비정(非情)한 것이며, 그리고 상황(狀況)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기 때문에 선의는 언제라도 악의(惡意)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한비자는 명확하게 그의 시야(視野)에 담고 있었다.
이걸 인간 불신으로 읽을 수도 있지만 저는 조금 다르게 읽었습니다. 사람의 선의에만 기대어 중요한 일을 설계하지 말고 상황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을 기준을 따로 마련해두라는 뜻으로요.
좋은 조언도 듣지 않으면 소용없다
책의 마지막 일화는 제나라 환공의 몰락입니다. 재상 관중은 죽기 전, 환공에게 누구를 후계자로 쓸지 조목조목 짚어주며 추천할 만한 사람과 피해야 할 사람을 가려주었습니다. 그런데 환공은 그 조언을 무시하고 관중이 경계했던 인물을 등용했고 결국 반란 속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습니다. 한비자는 이를 두고 말합니다.
충신의 말을 듣지 않고 독단적으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한다는 잘못된 판단은 자신의 명예를 손상하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는 첫 걸음이라고 한비자는 강조하고 있다.
아무리 뛰어난 사람을 곁에 두어도 그 말을 실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을 믿는 것과 사람에게 기대는 것은 다른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조직에서 사람 관리나 평가 기준을 고민하는 분
- 믿었던 관계에서 상처받은 경험이 있어 인간관계를 다시 정리해보고 싶은 분
- 동양 고전의 냉철한 현실 감각을 오늘의 조직 생활에 대입해보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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