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많이 힘든 시기에도, 정작 "저 우울증인 것 같아요"라는 말은 입 밖으로 잘 안 나옵니다.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에 가는데 마음이 아프면 꽤 오래 버텨보다가, 그것도 혼자 끌어안고 버텨보다가 뒤늦게 병원 문을 두드립니다. 김정원 저자의 《오늘 아내에게 우울증이라고 말했다》를 읽으면서 저도 그동안 제 마음 상태를 얼마나 미뤄왔는지 돌아보게 됐습니다.

인생 학점이 F라도 되는 듯한 코드
책은 저자가 정신과에서 진단 코드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F321, 중등도 우울증. 숫자와 알파벳으로 된 코드일 뿐인데 받아들이는 마음은 다릅니다.
인생 학점이 F라도 되는 듯 병명 코드까지 F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에서 이미 많은 게 읽힙니다. 우울증이라는 진단 자체보다, 그 진단을 '낙제'처럼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시선이 먼저 온다는 겁니다. 저자는 기자로 일하며 단신 기사 하나에도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10초마다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버티다 결국 병원을 찾았습니다.
약 봉투를 들고 아내에게 건 전화
진단을 받고 약을 받아 나오는 길, 저자는 다리가 풀려 택시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짧게 말합니다. "여보, 나 우울증이래." 그날부터 저자의 표현으로는 "우울증과의 원치 않는 동거"가 시작됩니다. 정작 더 마음을 울린 건 아내의 반응이었습니다. 말없이 방으로 들어갔다가 그날 밤 혼자 거실에서 우는 아내를 보며 저자는 괜히 말을 걸었다가 상황이 나빠질까 봐 아무 말도 못 했다고 적습니다. 나중에 들은 사정은 뜻밖이었습니다. 아내는 우울증 자체가 아니라, 남편이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던 거였습니다.
불안에 점수를 매기는 연습
치료 중 담당 의사가 알려준 방법 하나가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불안이라는 감정 자체를 없애려 하지 말고 그 감정에 숫자를 매겨보라는 겁니다.
불안을 완전히 없애는 게 치료의 목적은 아닙니다. 불안을 다룰 줄 아는 수준으로 만드는 게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의사는 이렇게도 덧붙입니다.
사실 불안뿐 아니라 분노, 슬픔 같은 감정은 없앨 수 없습니다. 없애서도 안 되고요. 감정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특정 감정 이후 따라오는 불편한 신체 증상이나 불쾌한 생각이 우리를 괴롭히는 거죠.
저도 불안하거나 짜증이 날 때마다 그 감정 자체를 빨리 꺼버리려고 애썼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감정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지금 몇 점짜리 불안인가"를 물어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끌려다니는 시간이 줄어든다는 말이 꽤 실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생각이라는 택시에 올라타지 않는 법
저자가 소개하는 또 다른 방법은 '생각 알아차리기'입니다. 머리 위 3미터쯤에 또 다른 내가 있다고 상상하고 지금 내가 하는 생각을 그 시선으로 바라보는 연습입니다. 생각에 빠져 허우적대는 승객이 아니라,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관의 자리에 서보라는 비유가 와닿았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을 저자는 이렇게 인용합니다.
새가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지만 머리 위에 둥지를 틀지 않게는 할 수 있다.
생각이 떠오르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습니다. 다만 그 생각이 눌러앉아 둥지를 틀게 두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복식호흡으로 몸의 감각에 집중하거나, 지금 상황을 소리 내어 중계하듯 묘사하는 것도 저자가 효과를 봤다는 방법들입니다.
적는 사람이 산다
치료 초기, 두 달 쉬고 다시 출근하기로 한 전날 밤 저자는 불안에 휩싸입니다. 그때 꺼내 든 방법이 '적자생존'입니다. 환경에 적응하는 생물이 산다는 그 적자생존이 아니라, 적는 사람이 생존한다는 뜻으로 저자가 새로 붙인 이름입니다. 불편한 상황과 거기서 올라온 감정을 하나씩 글로 써 내려가면, 날뛰던 생각이 차분해진다고 합니다. 의사는 이걸 '사고기록지'라 불렀지만 저자는 그 단어가 싫어서 '감정 일기'로 바꿔 불렀다고 적습니다. 이름을 자기 식으로 바꿔 부르는 것부터가 그 사람에게는 치료의 일부였던 셈입니다.
이 책은 거창한 깨달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냥 한 사람이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아내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약을 먹고 다시 출근하기까지의 과정을 민망할 정도로 솔직하게 적어 내려간 기록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마음이 힘든데도 병원 가는 걸 계속 미루고 있는 분
- 가족이나 배우자의 우울증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막막한 분
- 불안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한 분
'심리·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게으름도 습관이다』, 미루는 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불안해서였습니다 (0) | 2026.10.21 |
|---|---|
| 『몇 명쯤 안 보고 살아도 괜찮습니다』, 우정도 끝날 수 있다는 걸 말해주는 책 (0) | 2026.10.16 |
| 『아까 화냈어야 했는데』, 화를 못 내는 건 성격이 아니라 자존감의 문제였습니다 (0) | 2026.10.15 |
| 『인생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심리학』, 거절 못 해서 떠안은 짐은 결국 청구서로 돌아온다 (0) | 2026.10.14 |
|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팀장님 기분에 따라 사무실 공기가 바뀌는 이유 (0) | 2026.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