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차가워지면서 옷장 깊은 곳에 넣어뒀던 스웨터를 다시 꺼내는 계절이 왔습니다. 저는 이맘때마다 옷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기억이 딸려 나온다는 사실에 조금 놀랍니다. 시인 김현이 쓴 《아무튼, 스웨터》를 읽으면서 스웨터라는 평범한 옷 한 벌이 사람의 시간을 얼마나 많이 품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보풀이 잡혀야 비로소 생기가 도는 옷
책은 스웨터를 "스웨터리 스웨터"와 그렇지 않은 스웨터로 나누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전통적이고 기본에 충실한 스웨터, 오래 입어 보풀이 잡힌 스웨터일수록 오히려 더 생기 있어 보인다는 겁니다. 새 옷이 주는 깔끔함과는 다른, 시간이 쌓여야만 나오는 멋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웨터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현재하는 옷이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제 옷장 속 낡은 옷들을 떠올렸습니다. 유행이 지나서 버릴까 고민했던 옷 중에, 사실은 오래 입어서 더 좋아진 옷들이 있었습니다. 새것일 때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느껴지는 물건이 흔치 않은데, 스웨터는 그런 몇 안 되는 물건 중 하나인가 봅니다.
세상에 단 한 벌뿐인 옷을 뜨는 마음
아일랜드 아란섬 사람들은 스웨터 가슴팍에 각자의 집 모양을 무늬로 넣어 옷을 짰습니다. 꽈배기나 다이아몬드, 사선과 곡선을 저마다 다르게 겹쳐 넣었습니다.
뜨는 사람에 따라 세상에 단 한 채뿐인 스웨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공장에서 똑같이 찍어낸 옷이 아니라 뜨는 사람의 손끝에서 매번 다른 무늬가 나온다는 사실이 좋았습니다. 똑같은 실과 바늘로 시작해도 결과물은 뜨는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 그 안에 자기만의 실수와 기호가 고스란히 남는다는 것. 완벽함보다 그 사람다움이 더 귀한 물건이 세상에 많지 않은데, 손뜨개 스웨터가 그렇습니다.
지금 고른 옷이 지금 사는 몸
저자는 나이가 들면서 복부에 살이 붙고 건강검진에서 복부비만 진단을 받는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몸이 변하니 옷맵시도 변하고 그걸 마주하는 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고 적습니다. 그런데 그 민망함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내가 지금 고른 옷이 내가 지금 사는 몸이다.
저도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낄 때마다 옷장 앞에서 괜히 서글퍼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장을 보니, 몸을 감추는 옷을 고르는 일과 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고르는 일은 전혀 다른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의 몸에 맞는 옷을 고르는 것 자체가 이미 몸을 긍정하는 작은 행동일 수 있겠습니다.
엄마의 삐뚤삐뚤한 스웨터
저자의 어머니는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으면서 틈틈이 뜨개질로 자식들에게 스웨터를 떠주었습니다. 앞판과 뒤판의 길이가 맞지 않고 패턴도 들쭉날쭉했지만 그 옷은 어디서도 살 수 없는 옷이었습니다.
엄마의 스웨터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살 수 없던 유일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제 어머니가 손수 해주셨던 음식이나 바느질을 떠올렸습니다. 완벽하지 않아서 오히려 그 사람의 손길이 더 선명하게 남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지금은 공장에서 더 예쁘고 정교한 제품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시대인데도 그 삐뚤삐뚤함을 아쉬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걸 보면, 우리가 정말 아끼는 건 완성도가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간 시간과 손길인 것 같습니다.
스웨터를 뜨기 전에 필요한 건 바늘이 아니다
저자는 직접 스웨터를 짜보려고 뜨개 기술을 알아보다가 금방 포기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고는 한 가지를 깨우칩니다. 스웨터를 짜는 일은 편지를 쓰는 일과 같다는 것, 가장 먼저 필요한 건 기술이 아니라 받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스웨터를 짜려고 하는 이가 가장 먼저 준비해야 할 것은 털실도 바늘도 아니고 익혀야 할 것은 뜨개 기술도 아니었다.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누구’였다.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만든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을 오래 떠올리는 시간을 보내는 일입니다. 요즘은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 선물하는 일이 흔치 않은데, 이 문장을 보니 선물의 핵심은 손재주가 아니라 그 사람을 생각한 시간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멍 난 스웨터가 아름다운 이유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는 1982년 올이 풀리고 구멍이 숭숭 뚫린 검정색 스웨터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깔끔함과는 거리가 먼 옷이었지만 바로 그 결점 때문에 특별했습니다.
스웨터는 인간이 손을 움직여 처음으로 직조해냈던 옷이 지녔던 감촉을, 그 최초의 감각을 기억하게 한다.
너무 깨끗하고 기계적인 것에 길들여지다 보면 오히려 사람 손이 닿은 흔적을 특별하게 여기게 되나 봅니다. 완벽한 제품보다 어딘가 서툰 데가 있는 물건에 더 마음이 가는 경험, 저도 종종 합니다.
마음의 조리개를 여닫는 일
스웨터 소매와 목 부분의 고무뜨기를 저자는 '조리개'라고 부릅니다. 조리개를 열면 바람이 많이 들고 닫으면 적게 듭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조리개를 마음을 여닫는 장치에 빗댑니다.
마음의 조리개를 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 지나쳐온 세월과 그게 오래되어 그 도구의 존재조차 잊은 세월이 누구에겐들 없겠는가.
감정을 적당히 열고 닫는 법을 저도 아직 잘 모릅니다. 너무 많이 드러내서 후회하거나, 너무 꽉 닫아서 나중에야 후회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계절이 바뀌어 스웨터의 조리개를 만질 때마다 이 문장이 떠오를 것 같습니다.
이 책은 77가지 스웨터 이름을 따라가며 쓴 짧은 산문들의 모음이지만 실은 스웨터 이야기보다 그 옷을 입었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 오래 남습니다. 첫사랑, 어머니, 낯선 여행지에서 마주친 사람들까지.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한 번씩 꺼내 읽기 좋은 책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옷장 정리를 하다가 오래된 옷에 담긴 기억을 떠올려본 적 있는 분
- 짧은 산문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고 싶은 분
- 가을이나 겨울이 유독 마음을 건드리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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