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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라이프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글이 막힐 때 이윤기가 건네는 말

by summaries 2026.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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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 베스트셀러 칸을 보면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 유난히 많습니다. 챗GPT가 대신 써주는 시대인데도 다들 '내 문장'을 갖고 싶어 하는 걸까요. 저도 메모 앱에 쌓인 초고만 수십 개인데, 끝까지 밀어붙인 글은 몇 안 됩니다. 그러다 소설가이자 번역가 이윤기의 산문집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를 읽었습니다. 글쓰기 '기술'을 조목조목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평생 글과 번역을 업으로 산 사람이 자신의 실패와 습관을 솔직하게 풀어놓은 책이었습니다.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글이 막힐 때 이윤기가 건네는 말 표지

글을 쓰는 이유는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이윤기는 "나는 왜 문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멋진 대답을 준비해두지 않습니다. 쓰지 않고는 못 배길 운명이었다는 식의 낭만적인 설명도 거부하고 그저 인생이 그렇게 풀렸다고 말합니다.

문학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인생이 그렇게 풀렸다.

이 문장에서 오히려 마음이 놓였습니다. 뭔가를 시작하려면 사명감이나 거창한 포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사람의 솔직한 고백이 더 믿음직스러웠습니다. 글을 쓰는 이유를 미리 준비해두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벽 앞에서 망설이지 않기

글쓰기를 가로막는 '어둠의 벽'은 이윤기가 자주 꺼내는 이야기입니다. 그 벽 앞에서 망설이고 의심하면 결국 튕겨 나가거나 벽 속에 갇힌다면서 서산대사의 말을 빌려옵니다.

장히 어려운 일이기는 하겠지만, 목숨을 걸고 머리를 들이민다면 모기가 무쇠솥을 능히 뚫을 수도 있는 것이거니.

저는 글을 쓸 때마다 '이걸 써도 될까', '누가 읽어줄까' 하는 생각에 자꾸 멈춰 섭니다. 이 문장을 읽고 나니 망설임이야말로 벽을 더 단단하게 만드는 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일단 들이밀고 보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 같습니다.

글쓰기는, 포도가 포도주가 되는 일

번역을 평생 업으로 삼은 이윤기는 언어의 변화를 물리적 변화와 화학적 변화로 나눕니다. 텍스트를 그대로 옮기기만 하는 번역, 어디서 본 표현을 생각 없이 가져다 쓰는 글은 포도가 그냥 포도즙이 되는 수준에 그친다고 꼬집습니다.

번역 과정에서 일어나는 언어의 변화가 ‘단순한 물리적 변화’여서는 안 된다. 그런 번역은 컴퓨터도 해낸다. 문제는 ‘화학적 변화’다.

저도 회사 보고서나 메일을 쓸 때 어디서 본 표현을 그냥 붙여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뜻은 통하지만 제 생각은 하나도 들어가지 않은 문장이지요. 포도즙에서 포도주까지 가려면 제 나름의 해석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걸 이 대목에서 다시 느꼈습니다.

'보여지다'가 아니라 '보이다'

방송에서 해설자들이 즐겨 쓰는 "보여지는데요" 같은 표현을 이윤기는 그냥 넘기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우리말을 멋스럽게 꼬아서 더 어색하게 만드는 습관이라고 짚어냅니다.

‘보인다’의 으뜸꼴은 ‘보다’다. 해설가는 ‘보다’의 피동형을 ‘보여지다’로 멋스럽게 말한 모양이지만 ‘보이다’로 족하다.

저도 뭔가 있어 보이려고 "~되어지는", "~로 보여진다" 같은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쉬운 말을 쉽게 쓰지 못하는 건 자신감이 없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읽은 뒤로는 문장을 쓰고 나서 '이거 그냥 쉬운 말로 되지 않나' 하고 한 번 더 되물어보게 됩니다.

실패를 축하하는 이유

2005년 노벨문학상 발표를 앞두고 이윤기는 고은 시인의 수상에 대비해 원고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다른 작가가 받자 맨 먼저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실패와 좋은 글의 관계를 말합니다.

나에게 상을 안겨준 작품들, 사람들로부터 호평을 받은 대부분의 작품들은 ‘날려먹기’와 ‘다시 쓰기’의 아픈 경험과 관련이 있다.

술술 풀리는 글, 고생 없이 나온 글이 꼭 좋은 글은 아니라는 말이겠지요. 제 실수도 공들여 쓴 글보다 급하게 써서 보낸 메일에서 더 자주 나옵니다. 매끄럽게 써지지 않는 날은 뭔가 제대로 걸려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여 볼 만합니다.

바닥을 기어본 시절

마흔다섯, 번역가로서는 꽤 안정된 자리에 있을 때 이윤기는 갑자기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납니다. 전세금을 빼서 간 집에 식칼과 망치까지 챙겨갔다고 하니 얼마나 절박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는 그 시절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물은 고여 있으면 썩는다. 흐르려면 바닥을 기어야 한다. 사람 또한 그렇다.

이미 자리를 잡았다고 느낄 때일수록 더 불안해져야 하는 걸까요. 저는 익숙한 일을 반복하는 편이 안전하다고 믿고 살아왔는데, 이 대목을 읽으며 '안정'이라는 말이 때로는 '정체'의 다른 이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르바처럼, 사업이 거덜나도 춤을 추는 것

책의 제목은 이윤기가 평생 번역한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왔습니다. 조르바와 '나'는 함께 광산 사업을 벌였다가 완전히 망합니다. 그날 조르바는 주저앉아 울지 않고 해변에서 춤을 춥니다. 이윤기는 이 장면을 그리스어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로 풀이합니다.

보라, 조르바는 사업체 하나를 ‘춤’으로 변화시켰다.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거룩하게 되기)’이다.

어떻게든 수습하고 손실을 따질 법한 자리에서 조르바는 몸을 움직여 망한 사업을 전혀 다른 무언가로 바꿔버립니다. 글쓰기도 비슷한 일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실패한 하루, 엉망인 초고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요.

이 책은 평생 글과 말을 다루며 살아온 한 사람이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다시 썼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글쓰기 비법을 조목조목 알려주는 책을 찾는 분보다는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그럴듯한 글쓰기 비법보다 솔직한 경험담이 더 끌리는 분
  • 번역투나 상투적인 표현을 벗어나 내 말을 찾고 싶은 분
  • 안정된 자리를 떠나 다시 바닥부터 시작하길 고민하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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