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에서 "원가 10만 원짜리를 3만 원에 드립니다"라는 문구를 보면 왜 갑자기 그 물건이 꼭 필요한 것처럼 느껴질까요. 영업사원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왜 그 사람 말을 좀 더 믿게 되는 걸까요. 로버트 치알디니의 《초전 설득》은 이 질문에 "설득은 말을 꺼내는 순간이 아니라 그 직전에 이미 결정된다"고 답합니다. 치알디니는 자동차 영업사원, 다이렉트 마케터, 모금원들의 훈련 과정에 직접 들어가 3년 가까이 그들을 지켜보며 이 책을 썼습니다. 저도 이 책을 읽으며 최근에 누군가에게 설득당했던, 혹은 설득하려다 실패했던 순간들을 하나씩 되짚어봤습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미 승부가 끝난다
치알디니가 현장에서 지켜본 최고 실적자들은 설득력이 떨어지는 동료들과 제안 내용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점은 단 하나, 상대가 그 제안을 듣기도 전에 미리 마음을 열어두는 작업이었습니다.
설득persuasion의 귀재는 상대방이 메시지를 접하기도 전에 미리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과정인 초전 설득pre-suasion을 통해 최고로 거듭난다. 따라서 설득을 잘하려면 초전 설득을 잘해야 한다.
내용이 아니라 순서, 그러니까 무엇을 먼저 보여주고 듣게 하느냐가 결과를 가른다는 이야기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도 중요한 부탁을 하기 전에 괜히 날씨 얘기나 안부부터 묻는 버릇이 있는데, 어쩌면 그게 꽤 합리적인 습관이었던 셈입니다.
집 열쇠를 맡긴 이유
화재경보기를 팔던 영업사원 짐은 동료들과 제품 설명 방식이 똑같았습니다. 다만 그는 고객이 안전 테스트를 받는 도중에 일부러 중요한 서류를 차에 두고 왔다며 양해를 구하고 다시 들어올 때 고객의 집 열쇠를 받아 쥐었습니다. 저자가 그 이유를 묻자 짐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생각해봐요, 로버트. 당신은 어떤 사람을 당신 집에 마음대로 드나들게 하나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그렇게 하도록 하죠, 안 그래요? 나는 신뢰의 이미지로 고객과 연결되기를 바랐습니다.
제품 설명 한 마디 하기 전에, 고객의 머릿속에 이 사람은 믿을 만하다는 연상을 먼저 심어둔 겁니다. 생각해보면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만나자마자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데 오히려 믿음이 안 가고 어떤 사람은 사소한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모습 하나로 신뢰가 가더군요. 짐의 방법이 윤리적인지는 따져볼 문제지만 신뢰라는 감정이 말보다 먼저 만들어진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입니다.
"100만 달러를 부를 수는 없겠죠"
한 컨설팅 회사 대표는 입찰 미팅마다 고객사가 비용을 깎으려 드는 게 골칫거리였습니다. 그런데 7만 5,000달러짜리 제안을 내놓기 직전, 농담처럼 이런 말을 던지기 시작하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여러분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이 프로젝트에 대해 100만 달러를 청구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100만 달러라는 숫자가 먼저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 그 뒤에 나올 7만 5,000달러는 상대적으로 작게 느껴졌습니다. 이후로는 비용을 깎으려는 요구가 거의 사라졌다고 합니다. 연봉 협상이나 전세 계약을 할 때 저도 모르게 상대가 먼저 던진 숫자에 기준점을 맞춰본 적이 있다는 걸 이 대목에서 인정하게 됩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어떤 숫자를 먼저 듣느냐가, 그 뒤 모든 계산의 저울을 이미 기울여놓는 셈입니다.
돈을 더 준다고 사람이 더 움직인 건 아니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한 경제학자는 줄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새치기를 양해해달라며 1달러, 3달러, 5달러, 10달러를 각각 제안하는 실험을 했습니다. 예상대로 액수가 커질수록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습니다. 양보한 사람들 중 실제로 그 돈을 받아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금액이 큰 제안을 받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이 남자가 이렇게 큰돈을 주겠다는 것을 보니 앞줄에 서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나 보군.’이라고 생각하며 선뜻 자리를 내줬다.
돈이 사람을 움직인 게 아니라, 돈의 크기가 얼마나 절실한 사정인가를 알려주는 신호로 읽혔던 겁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누군가 부탁을 할 때 돈 액수보다 "급해서 그런데"라는 말 한마디에 더 쉽게 마음이 움직였던 제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건 계산보다는 사정에 대한 공감일 때가 생각보다 많습니다.
카메라가 머무는 자리가 원인이 된다
치알디니는 사람이 주의를 기울인 대상에 저절로 인과관계까지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 1982년 타이레놀 독극물 사건 당시, 피해가 발생한 제품의 제조번호 2880과 1910이 뉴스에 반복해서 나오자 이 숫자로 복권을 사는 사람이 급증해서 일부 주에서는 해당 번호의 복권 판매를 금지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숫자 자체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도, 집중적으로 보도된 대상이라는 이유만으로 당첨될 이유가 있는 숫자처럼 느껴진 겁니다.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이 두 숫자에 대중이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무언가에 초점이 맞춰지면 그 무언가는 사건을 발생시키는 능력인 원인 변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요즘 제가 매일 들여다보는 피드도 비슷합니다. 알고리즘이 반복해서 보여주는 주제가 곧 요즘 가장 중요한 일처럼 느껴지곤 하니까요. 실제로 중요한 일이어서 눈길이 가는 게 아니라, 눈길이 자주 가다 보니 중요한 일처럼 보이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걸 이 책을 읽고서야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이 책은 "어떻게 말해야 설득력이 생기는가"보다 "말하기 전에 무엇을 먼저 보여줄 것인가"를 다룹니다. 특히 이런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협상이나 영업, 제안 미팅을 앞두고 있는 분
- 광고나 마케팅 문구를 만들어야 하는 분
- 자신이 유난히 쉽게 설득당하거나, 반대로 설득에 자주 실패한다고 느끼는 분
- 뉴스나 SNS 피드를 보면서 이게 정말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가끔 던져보고 싶은 분
다음에 누군가를 설득해야 할 일이 생기면, 할 말을 고르기 전에 먼저 물어보시면 좋겠습니다. 상대방이 지금 무엇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그리고 그게 내가 원하는 결론과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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