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번아웃'이라는 말을 듣지 않는 날이 별로 없습니다. 퇴근길에 괜히 눈물이 핑 돌거나 주말 내내 아무것도 안 했는데 월요일 아침이 더 무겁게 느껴지는 분이라면 아마 공감하실 겁니다. 저도 그런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많이 지쳐 있습니다』를 읽으면서 이게 제가 유독 약해서 생기는 일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30년 넘게 트라우마 치유를 연구한 저자 로라 판 더누트 립스키는 이 상태를 '과부하(Overwhelm)'라고 부릅니다.

과부하는 땅거미처럼 조용히 번집니다
저자는 과부하가 어느 한순간 터지는 게 아니라고 봅니다. 저널리스트 에번 오스노스가 독재의 등장 과정을 설명한 문장을 가져와 과부하도 똑같은 방식으로 온다고 짚습니다.
독재가 한 국가를 지배하는 시점은 정확히 언제일까? 어느 한순간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땅거미처럼 다가와 눈에 익는 것이다.
저도 돌이켜보면 언제부터 지쳤는지 정확히 짚을 수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무기력해진 건 아니었습니다. 매일 조금씩 눈에 익어서 몰랐던 거였습니다. 책에 따르면 2015년 《포브스》 설문에서 응답자의 14퍼센트가 만성 과부하 상태라고 답했고 과도한 불안을 느낀다고 답한 미국 대학생 비율도 2011년 50퍼센트에서 2016년 62퍼센트로 늘었다고 합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가르는 일
책은 과부하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먼저 통제 가능한 범위와 아닌 범위를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인이자 활동가인 오드리 로드의 말을 빌려 이렇게 적습니다.
자신을 보살피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노력이자 정치적인 싸움이다.
내 손으로 바꿀 수 없는 일 앞에서 자책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 힘을 쓰라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거창한 각오가 아니라 '이 상황에서 피해를 줄이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하나만 들고 있어도 꽤 다르다는 걸, 저도 요즘 업무가 몰릴 때 시험해보고 있습니다.
일 자체보다 사람이 문제일 때가 많습니다
책에는 여러 직업군의 사람들이 들려준 말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중 한 청년이 어느 직장 집단상담에서 눈물을 흘리며 꺼낸 말이 특히 오래 남았습니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매일 내 안의 일부를 죽여야 해요. 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죠.
어느 회사든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겁니다. 책은 여러 직종의 증언을 모아 야근이나 업무량만큼이나 사람들과의 관계가 과부하를 키운다는 걸 보여줍니다. 미국·유럽·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문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국제 여론조사에서도 절반 넘는 사람이 정보량이 계속 늘면 곧 한계에 이를 거라고 답했다고 하니, 어디든 사정이 비슷한 모양입니다.
소화하지 못한 감정은 결국 '출혈'이 됩니다
저자는 쌓인 피로와 감정을 제때 풀어내지 못하면 결국 터져 나온다고 말하며 이를 '출혈'이라는 말로 설명합니다.
포화 상태는 불쾌하고 해로우며 심지어 위험하다. 따라서 인간은 포화 상태에 오래 머물지 않으려고 한다. 포화 상태에서는 ‘출혈’이 생긴다. 출혈은 하나의 행동 또는 일정한 행동 양식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학교나 단체, 지역사회에 좋지 않은 흐름으로 작용한다.
가족에게 괜히 날카롭게 말하거나 사소한 일로 동료와 부딪히는 순간들이 사실은 포화 상태의 증거였다는 걸 책을 읽으면서 알았습니다. 저도 유난히 피곤한 주에는 별일 아닌 일에 짜증이 치솟을 때가 있는데 그게 성격 문제가 아니라 그냥 쌓인 게 터진 거였다는 설명이 묘하게 위로가 됐습니다.
적을수록 좋다 — 1퍼센트의 법칙
책이 제안하는 해법은 생각보다 소박합니다. 거대한 변화보다는 작은 조정을 쌓으라는 쪽입니다.
‘한계 이익의 총합’ 원리에 따르면, 몇 가지 영역에서 1퍼센트씩 개선되면 그 효과가 쌓여 큰 이익으로 변한다.
책은 산만해지면 의도에 집중하고 고립되면 현재에 머물고 무언가에 집착하게 되면 바깥으로 호기심을 돌리고 무기력해지면 기운을 낼 작은 방법부터 찾으라고 권합니다. 거창한 계획 대신 오늘 하루 1퍼센트만 나아지는 선택을 하나 고르라는 조언이 책 내내 되풀이됩니다.
게으름도 몸에 필요한 영양소입니다
끝없이 바쁜 걸 자랑처럼 여기는 문화에서는 '멈춘다'는 선택 자체가 어렵습니다. 저자는 수필가 팀 크라이더의 말을 인용합니다.
게으름은 단지 방종이나 악이 아니다. 뇌에 반드시 필요한 비타민 D처럼, 게으름은 우리 몸에 필수요소다. 게으름이 주는 여백과 고요는 삶에서 물러나 전체를 바라보고, 의외의 것들을 서로 연결하고 여름철의 거친 번개처럼 영감이 떠오르게 하는(역설적으로 일을 마무리하는) 필수 조건이다.
바쁘게 사는 걸 유능함의 증거로 여기던 저에게는 뼈아픈 문장이었습니다. 책은 끈기와 헌신이 무조건 좋은 가치는 아니라고, 때로는 멈추는 선택이 자신을 지키는 더 어려운 용기라고 말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요즘 유독 피곤하고 별일 아닌 일에 쉽게 서운해지는 분, 번아웃이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한 지속적인 무기력을 느끼는 분, 혹은 누군가를 돌보느라 자기 상태를 돌아볼 틈이 없었던 분이라면 이 책이 꽤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거창한 해답을 주는 책은 아니지만 적어도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는 확인은 확실히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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