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연휴가 끝나고 나면 친구들 사이에서 꼭 한 번씩 돌아오는 화제가 있습니다. “이번엔 엄마가 또 이런 말을 했다”는 이야기. 저도 명절이나 생일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 전에 숨을 한 번 고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반갑고 그리운 마음과, 또 무슨 말을 듣게 될지 모른다는 긴장감이 동시에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전화를 끊고 나면 이상하게 기운이 빠지는데,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최근 읽은 『나는 나, 엄마는 엄마』는 이 애매한 감정에 처음으로 이름을 붙여준 책이었습니다. 저자 가토 이쓰코는 1993년부터 오사카시립대학교에서 ‘엄마와 딸’ 워크숍을 열어온 페미니스트 상담가로, 오랫동안 모녀 관계로 상담실을 찾는 여성들을 만나왔습니다. 이 책은 여섯 쌍의 모녀 사례를 통해 딸들이 왜 유독 엄마 앞에서 자유롭지 못한지, 그리고 그 속박에서 어떻게 걸어 나올 수 있는지를 다룹니다.

“엄마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걸까요” — 모든 딸을 멈춰 세우는 질문
책은 상담실을 찾는 딸들의 공통된 말버릇에서 시작합니다. 갈등이 있어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언젠가 엄마도 이해해줄 거라는 희망만 붙잡은 채 시간을 흘려보낸다는 겁니다.
무엇보다 이런 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죄책감이다. “정말 엄마에게 이렇게 해도 괜찮은 걸까요?”라며 결단을 미룬다. 죄책감은 딸들이 자신을 옭아매는 모녀 관계에서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도록 막는다.
저도 이 대목에서 멈춰 섰습니다.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때, 명절에 못 간다고 말할 때, 머릿속에서 늘 먼저 올라오는 문장이 바로 저 질문이었거든요. 저자는 그 반대편에 선 말도 함께 보여줍니다.
‘엄마가 싫다’고 소리 내어 말하는 행위는 딸을 자유롭게 한다. 싫다는 감정은 잘못도, 그 무엇도 아니다.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이 곧 나쁜 딸이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감정을 인정하는 것과 관계를 끝내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인데, 저는 그동안 둘을 하나로 묶어놓고 두려워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상담실에 엄마는 오지 않는다 — 누가 힘을 쥐고 있는가
저자는 수십 년간 상담실에서 마주한 패턴을 하나 짚습니다. 모녀 갈등으로 상담을 받으러 오는 쪽은 거의 언제나 딸이고 엄마는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는 엄마가 권력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엄마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권력자는 괴롭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힘든 사람은 권력을 갖지 못한 쪽이다.
이 문장은 괴로움의 크기를 비교해 엄마를 비난하려는 게 아니라 관계의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힘든 사람이 먼저 움직여야 변화가 생긴다는, 다소 불공평하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 엄마는 엄마” — 슬로건 하나가 만든 거리
책에 등장하는 아키코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엄마와 단둘이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처음엔 서로를 지켜주는 좋은 관계였지만 엄마의 불안이 심장 발작 같은 증상과 ‘죽어버리겠다’는 말로 번지면서 아키코의 삶은 엄마의 전화벨에 완전히 묶여버립니다. 상담사가 해준 조언 한 줄이 전환점이 됩니다.
아키코 씨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어머니는 당신에게 의존하게 됩니다. 이걸 어머니께 드리고, 그 후에는 그냥 내버려두세요.
아키코는 엄마와 만나는 시간을 ‘매주 월요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3시 반까지’로 못 박고 그 밖의 시간에는 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10년을 지켜온 슬로건이 바로 ‘나는 나, 엄마는 엄마’입니다. 거리를 정해두는 것만으로 관계가 숨 쉴 공간이 생긴다는 걸, 저도 제 안부 전화 습관을 떠올리며 곱씹게 됐습니다.
엄마는 왜 그렇게 됐을까 — 타자 우선으로 길러진 여성들
다른 모녀 심리서와 달리 이 책은 딸의 상처만 말하지 않고 엄마가 그렇게 된 사회적 배경까지 짚습니다. 저자는 여성이 어릴 때부터 자신의 욕구를 뒤로 미루도록 훈련받는다고 말합니다.
여성들은 타자의 욕구를 충족하려 자신의 욕구를 중단하는 법을 학습한다. 마찬가지로 타자의 욕구와 자신의 욕구가 충돌할 경우 여성은 인내하는 쪽에 세워진다.
엄마들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같은 방식으로 길러졌다는 겁니다. 책은 한발 더 나가 모성에 대한 통념도 건드립니다.
엄마라면 누구나 아이에게 무조건적이고 아낌없는 애정을 쏟아부을 거라는 생각은 신화에 불과하다.
이해는 용서와 다릅니다. 저자는 엄마의 사정을 알게 된다고 해서 반드시 엄마를 용서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긋습니다. 이해의 목적은 딸이 멍에에서 벗어나는 것, 그뿐입니다.
혼자서라도 행복해지는 편이 낫다
그렇다면 끝까지 변하지 않는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자는 꽤 단호합니다.
딸에게는 엄마의 불행에 대한 책임이 없다. 자녀라면 당연히 엄마의 행복을 바라는 법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감정이나 인생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그러면서 자신의 은사가 늘 했던 말을 인용합니다.
설령 한 사람을 불행 속에 방치하게 되더라도 두 사람이 불행하게 사느니 한 사람이라도 행복해지는 편이 낫다.
엄마를 늪에서 끌어내려 함께 가라앉느니, 먼저 물 밖으로 나오라는 뜻입니다. 매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책 전체를 읽고 나면 이 문장이 포기가 아니라 생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게 분명해집니다.
배은망덕한 딸이 되어도 괜찮다
책 후반부, 관계를 지켜내는 법을 정리하며 저자는 이런 말을 남깁니다.
엄마가 낳아주고 키워줬다고 해서 자신을 희생할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 낳아주고 키워준 데 대한 가장 큰 보답은 ‘보란 듯이 잘 사는 것’이다.
저는 이 부분에서 효도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내 인생을 갈아서 엄마를 만족시키는 게 아니라, 내가 멀쩡히 잘 살아내는 것 자체가 보답이 될 수 있다는 관점은, 생각보다 단순하지만 꽤 힘이 셉니다.
친구는 어디에나 있다
책은 혼자 싸우지 말라는 말로 마무리됩니다.
친구는 어디에나 있다. 모두 말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엄마 얘기는 꺼내기 어려운 주제라서 다들 조용히 각자의 모녀 관계를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이 책은 그 침묵을 깨고 ‘나만 이런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줍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엄마와 통화를 끊고 나면 이유 없이 기운이 빠지는 분
- 엄마의 부탁을 거절할 때마다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
- 엄마와의 관계를 ‘이해’는 했지만 ‘편해지지’는 않았던 분
- 나이 든 부모와의 거리를 어떻게 정해야 할지 고민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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