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어보면 며칠 전, 몇 달 전에 써놓고 다시 들여다보지 않은 메모가 몇 개나 있으신가요? 저는 한번 세어보다가 그만뒀습니다. 회의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 친구가 툭 던진 좋은 말 한마디, 나중에 찾아보려고 링크만 걸어둔 기사까지, 저장은 해놓고 다시 열어보지 않은 메모가 훨씬 많았습니다. 정혜윤 작가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서 저는 이 책이 메모를 잘 정리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았습니다. 오히려 메모를 잘 못해서 괴로운 사람의 고백이었고 그 메모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묻는 이야기였습니다.

메모를 못하는 사람의 고백
작가는 첫 장에서부터 자신이 메모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털어놓습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그 순간에 완전히 빠져버려서 펜을 꺼낼 틈이 없다고 합니다. 나중에 조용히 혼자가 되어서야 그 이야기를 적어보려 하면 이미 다 잊어버린 뒤라고 합니다.
메모해둘걸.
저도 이 문장 앞에서 뜨끔했습니다. 좋은 대화를 나누다가 휴대폰을 꺼내면 분위기가 깨질까 봐 참았던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집에 와서 그 이야기를 다시 떠올려보면 제목도, 사람 이름도, 핵심 문장도 흐릿해져 있었습니다. 메모를 못 해서 아쉬웠던 밤이 저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무엇을 기억하려 했는지가 내일을 만든다
작가는 메모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취업을 준비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설명합니다. 그 시절 노트에 좋은 문장을 모으며 스스로에게 이런 다짐을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나의 내일은 오늘 내가 무엇을 읽고 기억하려고 했느냐에 달려 있다.
이 문장을 읽고 저는 최근 제 메모장을 다시 열어봤습니다. 저장해둔 것 대부분이 할 일 목록과 배송 조회 번호였습니다. 마음에 남았던 문장이나 생각은 거의 없었습니다. 무엇을 붙잡아두려고 했는지를 보면 그 사람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보인다는 말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메모는 삶으로 부화해야 한다
책 중반, 작가는 세월호 희생자들의 생일과 꿈이 적힌 달력, 그리고 세상 온갖 동물들의 기념일이 적힌 달력을 나란히 두고 봤던 이야기를 합니다. 그 두 달력을 보며 '꿈'에 관한 책을 쓰고 싶어 메모를 수없이 했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메모가 헛되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혼자서 메모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우리는 사회적 존재다. 메모는 재료다. 메모는 준비다. 삶을 위한 예열 과정이다.
메모장을 채우는 것으로 끝나면 반쪽짜리라는 말로 읽었습니다. 저장만 하고 다시 열어보지 않는 메모가 쌓여 있다면, 그 메모는 아직 예열만 하고 있는 셈입니다. 언젠가 삶 쪽으로 넘어가야 할 재료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메모
작가에게는 평생 음악에 매달려 가난하게 사는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소중히 여기던 기타를 잃어버렸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 비슷한 소리를 내는 기타를 겨우 구했을 때, 작가에게 그 기타에 짧은 문구를 하나 써달라고 부탁합니다. 작가는 몇 분간 고심한 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금 어디선가 고래 한 마리가 숨을 쉬고 있다.
메모가 늘 자기 자신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걸 이 장면에서 알았습니다. 저도 힘들어하는 후배에게 무심코 적어준 문장이 몇 년 뒤 그 후배 다이어리에 그대로 남아 있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내가 적은 말이 남의 하루를 견디게 하는 문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생각보다 자주 일어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잊힌 존재를 기억하는 방식
책 뒷부분에서 작가는 두 개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동물원에서 늙고 병들어 죽은 장애 콘도르 '꼽추'를 취재하며 남긴 메모, 다른 하나는 태평양전쟁 당시 조선인 포로감시원으로 끌려갔다가 전범으로 사형당한 이들에 관한 메모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관심을 받지 못하고 세상에서 잊힌 존재를 다룹니다.
한 인간이 살았고 생의 어떤 순간 그 사람은 완전히 혼자였다.
이 문장을 읽으며 저는 매일 스쳐 지나가는 뉴스 속 이름들을 떠올렸습니다. 사고, 재난, 산업재해 기사 속 숫자로만 남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메모한다는 것이 누군가를 숫자가 아니라 이름으로 기억하려는 노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메모지가 삶의 이유가 되는 순간
책의 마지막 인물 이학래는 사형당한 동료 스물세 명의 이름이 적힌 메모지를 평생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는 그 이름들을 위해 칠십오 년 동안 항의서한과 탄원서를 썼습니다.
메모지에 적힌 그 이름들이 그에게 삶의 이유를 주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메모지가 자신의 삶이다.
메모가 종이 한 장을 넘어 한 사람의 남은 평생을 붙잡아주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걸, 저는 이 대목에서 처음 실감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습관처럼 적어두는 메모 중에도 그런 힘이 있는 한 줄이 섞여 있을지 모릅니다.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 메모장에 저장만 해두고 다시 열어보지 않는 습관이 있는 분
- 좋은 문장을 옮겨 적어놓고도 삶은 그대로인 것 같아 허탈했던 분
- 잊히는 존재를 기억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궁금한 분
'에세이·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쉰 살에 경차로 바꾸고 알게 된 것들 -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0) | 2026.09.27 |
|---|---|
| 이유 없이 마음이 가라앉는 밤, 저는 낯선 방 하나를 떠올립니다 (0) | 2026.09.25 |
| 『먹고사는 게 전부가 아닌 날도 있어서』, 부캐가 유행어가 되기 전 이미 여러 이름으로 살아온 사람 (0) | 2026.09.23 |
| 『엄마의 언어로 세상을 본다면』, 엄마들은 왜 늘 아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할까 (0) | 2026.09.22 |
|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귀성 열차표 한 장 끊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추석은 어떤 날일까 (0) | 2026.0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