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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라이프

『라틴어 수업』, '있어 보이려고' 시작해도 괜찮은 이유

by summaries 2026. 10.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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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있어 보이려고' 뭔가를 시작했다가 괜히 부끄러워진 적 있으신가요? 저는 대학 시절 교양 수업을 고를 때 솔직히 그랬습니다. 어려워 보이는 과목을 들으면 좀 달라 보일 것 같아서요. 『라틴어 수업』을 읽으면서 그 기억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한동일 교수는 서강대에서 10년 가까이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이 책은 그 수업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는데, 라틴어 문법보다는 공부와 인생에 대한 이야기가 훨씬 많이 나옵니다.

『라틴어 수업』, '있어 보이려고' 시작해도 괜찮은 이유 표지

'위대한 유치함'에서 시작해도 된다

저자는 매 학기 첫 수업에서 학생들에게 왜 라틴어를 들으러 왔는지 묻습니다. 돌아오는 답 중에는 "있어 보이려고요"라는 대답도 섞여 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 대답을 부끄러운 게 아니라 솔직한 시작점으로 받아들입니다.

있어 보이려고, 젠체하려고 시작하면 좀 어떻습니까? 수많은 위대한 일의 최초 동기는 작은 데서 시작합니다.

저도 뭔가 새로 시작할 때마다 그 이유가 너무 거창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자의 말처럼 유튜브도 그냥 재미있는 영상을 공유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출발했다고 하니, 동기가 작다고 해서 그 일이 작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첫 수업은 휴강, 그리고 아지랑이를 보라는 말

저자는 수업 첫날, 교재와 과제 설명을 짧게 마치고 "프리마 스콜라 알바 에스트Prima schola alba est", 즉 "첫 수업은 휴강입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뜻밖의 과제를 내줍니다. 운동장에 나가 봄날의 아지랑이를 보고 오라는 것입니다.

공부한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

아지랑이는 웬만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평소엔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는 제 마음 상태를 떠올렸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제 안에서 뭐가 피어오르고 있는지 들여다볼 틈도 없이 하루를 보내는 날이 많았거든요.

라틴어가 가르쳐주는 수평성

저자는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어가 상대에 따라 말투가 쉽게 바뀐다는 점에 놀랐다고 합니다. 반면 라틴어는 상대의 나이나 지위와 무관하게 존중의 표현을 쓴다고 설명합니다.

라틴어는 기본적으로 상대가 누구든지 간에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수평성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죠.

로마는 식민지 출신 인재들을 제국 경영에 그대로 기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 배경에도 이런 언어의 태도가 있었다는 설명이 이어집니다. 언어가 사고의 틀이라면, 제가 평소 쓰는 말투에도 저도 모르게 누군가를 내려다보는 습관이 묻어 있지 않을지 돌이켜보게 됩니다.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저자는 세네카가 남긴 "NON SCHOLAE, SED VITAE DISCIMUS"라는 문장을 라틴어 공부의 목적을 설명하는 핵심으로 가져옵니다.

우리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위해서 공부한다.

수능 외국어 지문을 외국인조차 이해하기 어렵다는 저자의 지적을 읽으며 저 역시 그렇게 오래 배운 영어 문법을 지금 얼마나 실제로 쓰고 있는지 돌아봤습니다. 시험을 맞히기 위한 공부와 삶에 쓰기 위한 공부는 분명 다른 길인 것 같습니다.

강을 건넜다면 배는 두고 가야 한다

저자는 장점과 단점을 뜻하는 라틴어 '메리툼'과 '데펙투스'를 설명하면서 한때의 장점이 시간이 지나면 단점으로 바뀔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냅니다. 몸이 약해서 규칙적인 공부 습관이 생겼는데, 그 습관이 오히려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는 걸림돌이 되었다는 자신의 경험도 함께 들려줍니다.

강을 건너고 나면 배는 강에 두고 가야 한다.

이미 쓸모를 다한 배를 아깝다고 계속 지고 가면 짐이 될 뿐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한때는 저를 버티게 해줬지만 지금은 저를 옭아매는 습관이나 생각이 있는지 한 번 점검해봐야겠습니다.

이 책은 라틴어를 가르치는 책이라기보다 라틴어라는 창을 통해 공부와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가 문법의 벽에 부딪혀 그만둔 경험이 있는 분
  • 공부든 일이든, 하는 이유를 자꾸 되묻게 되는 분
  • 한때 나를 지켜줬던 습관이 지금은 오히려 부담이 되고 있다고 느끼는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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