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 모이면 손자나 조카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어색하게 앉아 있다가 헤어진 경험, 다들 한 번쯤은 있으실 겁니다. 요즘 애들은 말이 없다고 서운해하면서도 정작 제가 먼저 무슨 질문을 던져야 할지는 떠올리지 못합니다. 소설가 조정래와 그의 손자 조재면이 함께 쓴 『할아버지와 손자의 대화』는 이 막막함에 구체적인 방법을 하나 던져 줍니다. 말로는 안 되니 글로 대화를 시작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들의 상처, 그리고 손자와의 거리
책은 조정래 작가가 군대에서 구타를 당해 목 디스크를 얻은 아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아들은 그 사실을 한참 뒤에야 어머니에게만 털어놓았습니다.
보초를 서면서 밤마다 맞았는데, 안 맞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자책 속에서 그는 복학하는 아들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어 매일 아침 신문 사설을 함께 읽는 ‘사설 공부’를 시작합니다. 세월이 흘러 그 공부 방식은 멀리 떨어져 지내던 손자 재면에게도 이어졌습니다. 가평의 기숙학교, 이어서 용인의 고등학교로 떠난 손자를 그리워하며 할아버지가 혼자 사설을 모아 스크랩북을 만들어 전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손자가 먼저 쓰겠다고 나섰을 때
스크랩북을 받은 지 1년쯤 지난 어느 날, 말수 적은 손자가 짧게 한마디를 던집니다.
할아버지, 써요.
그렇게 받은 첫 원고가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을 다룬 A4 여섯 장짜리 글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썼다는 걸 믿기 힘들 만큼 논리가 정연했습니다. 재면은 글을 이렇게 열었습니다.
‘역사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후 할아버지도 같은 주제로 글을 썼고 그렇게 손자와 할아버지는 말이 아니라 문자로 된 긴 대화를 이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사건, 두 세대의 시선
국정 교과서를 두고 재면은 전국 5,500여 학교 중 단 한 곳만 신청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논리의 허점을 꼬집었고 할아버지는 역사라는 것의 본질을 짚었습니다.
역사란 살아 숨 쉬는 생명체다. 왜냐하면 오늘을 사는 민족 성원, 국가 성원 들이 역사를 오늘을 비추는 거울로 삼고, 내일을 밝히는 등불로 삼기 때문이다.
손자는 제도의 모순을 꼼꼼히 분석하고 할아버지는 역사 그 자체가 지닌 무게를 이야기했습니다. 같은 사건을 서로 다른 눈으로 보고도 결국 같은 결론에 닿는 과정이 신기하게 읽혔습니다.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각자의 언어로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다룬 글에서도 둘의 접근은 달랐습니다. 재면은 기업 윤리라는 틀로 사태를 바라봤습니다.
소비자의 돈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훔쳐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훨씬 격렬했습니다.
그 사건은 우리의 자본주의 사회, 부실한 국가, 그리고 양심 없는 지식인 집단이 야합해서 일으킨 끔찍스러운 살인극이었기 때문이다.
손자는 분석으로, 할아버지는 분노로 같은 문제를 다뤘습니다. 가족 안에서 세대가 다른 두 사람이 사회 문제를 놓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부딪혀 본 적이 저에게는 없었던 것 같아 부러웠습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손자의 할 말
게임 셧다운제를 다룬 글에서 재면은 청소년이 게임을 택한 게 아니라 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썼습니다.
게임이 다른 놀이보다 월등해서 청소년들의 선택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기에 그것을 선택한 것이란 말이다.
이 글은 게임을 변호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시간과 공간과 돈이라는 세 가지 제약 속에 갇힌 청소년의 현실을 차분히 풀어 냅니다. 손자가 이렇게까지 또렷한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걸, 할아버지도 글로 받아 보고서야 알았을 겁니다.
마무리하며
이 책을 덮고 나서 떠오른 질문은 하나였습니다. 저는 제 가족의 누군가와 사회 문제 하나를 놓고 끝까지 의견을 나눠 본 적이 있었나 하는 겁니다. 말로는 겉돌기만 하는 대화가 글로는 오히려 깊어질 수 있다는 걸, 이 할아버지와 손자가 보여 주었습니다. 손자나 조카와 대화가 끊긴 것 같아 답답한 분, 사회 문제를 가족과 나누는 법을 고민해 본 분, 세대 차이보다 대화 방식이 문제였던 건 아닐까 돌아보고 싶은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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