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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컬러의 말』, 색 이름 하나에 숨어 있던 욕망과 편견의 역사

by summaries 2026.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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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립스틱이나 페인트 색상표에서 본 색깔 이름 하나를 떠올려 보시겠어요? '누드', '베이지', '사프란' 같은 이름을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적이 많을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컬러의 말』을 읽고 나니 그 평범한 이름 하나하나에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역사가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카시아 세인트 클레어는 10년 가까이 패션 잡지에 매달 색을 하나씩 연재하면서 색이 그저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정치, 과학, 욕망, 차별이 뒤섞인 역사의 산물이라는 걸 보여줍니다.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몇 가지 색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컬러의 말』, 색 이름 하나에 숨어 있던 욕망과 편견의 역사 표지

리드 화이트 — 아름다움을 위해 목숨을 건 색

저자는 몇 세기 동안 화가와 여성 모두가 가장 많이 썼던 흰색 안료, 리드 화이트(연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투명하고 어디에나 잘 붙는 데다 값도 쌌지만 원료가 납이었던 탓에 이 안료를 만들던 사람들은 끔찍한 대가를 치렀습니다.

리드 화이트의 생산에 관여한 인부들은 즉각적인 복통과 내장의 뒤틀림 및변비를 호소했다. 급성 열과 심한 천식 또는 호흡 곤란도 딸려왔다. 곧 두통 또는 어지럼증이 찾아오고 미간에 통증이 가시지 않으며, 눈이 멀고 멍청해지며 마비는 물론 식욕상실, 고통과 잦은 구토에 진한 가래, 때로는 성마름과 극단적인 신체 쇠약을 겪는다.

더 안타까운 건 이 안료가 안료로서만 쓰인 게 아니라 여성들의 화장품으로도 오랫동안 인기를 누렸다는 사실입니다. 책에는 연백 화장품을 즐겨 쓰다 27세에 요절한 18세기 사교계 미인의 이야기도 나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지금도 피부 시술이나 다이어트 보조제 광고에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때로는 건강보다 앞선다는 사실은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인디언 옐로 — 소 오줌 한 덩어리를 쫓은 아홉 달

인디언 옐로라는 안료는 햇살 같은 노란빛을 내지만 정체가 불분명해 오랫동안 화가와 물감상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1880년, 식물학자 조지프 후커 경이 진원지를 밝혀내겠다며 인도에 편지를 보냈고 아홉 달 반이 지나서야 답장이 돌아왔습니다. 답은 다름 아닌 망고잎만 먹여 키운 소의 오줌이었습니다.

오줌, 단지, 이파리는 자취를 감췄지만 인디언 옐로 안료만은 여전히 오줌 냄새를 희미하게 풍기며 큐 왕립식물원의 수장고에 남아 있다.

저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별것 아닌 궁금증을 끝까지 파고드는 태도에 대해 다시 생각해봤습니다. 아홉 달이나 기다려서 얻은 답이 고작 소 오줌이라니 허무할 법도 한데, 후커는 그 답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사소해 보이는 질문도 누군가가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역사가 된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같습니다.

베이지 — 아무도 밉보이지 않으려는 색

저자는 베이지색의 양면성을 짚습니다. 누구의 기분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안전한 선택이지만 동시에 아무런 개성도 드러내지 않는 색이라는 겁니다. 부동산 책은 집을 팔 때 베이지를 쓰지 말라고 조언할 정도입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베이지색을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저도 이사할 때마다 벽지나 가구를 고르면서 가장 무난한 색을 찾았던 기억이 납니다. 누군가에게 밉보이기 싫어서 혹은 나중에 되팔기 쉬우라고 중립을 택한 거였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꼭 제가 원했던 색은 아니었습니다. 베이지를 둘러싼 이 책의 설명을 보고 나니, 제가 평소에 '무난하다'고 포장했던 선택들이 실은 얼마나 소심했는지 들여다보게 됐습니다.

누드 — '살색'이라는 이름이 감춘 질문

2010년, 미셸 오바마가 입은 드레스를 두고 한 언론이 '누드색'이라고 보도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 색이 백인의 피부색만을 기준으로 삼은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반창고부터 속옷까지 '누드'라는 이름이 특정 인종의 피부색만 대표해온 역사를 짚습니다.

‘누드’보다 피부색이 짙은 우리는 반창고부터 팬티스타킹, 브래지어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우리가 색의 측면에서 배제되어왔는지 깨닫는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색의 이름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름이 아니라 오랫동안 반복된 배제의 증거일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다행히 요즘은 화장품 브랜드들이 다양한 피부색의 제품 라인을 늘리고 있다고 하니, 적어도 이 색 하나만큼은 조금씩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셈입니다.

사프란 — 향 한 줌에 담긴 욕망의 무게

사프란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향신료 가운데 하나입니다. 꽃 몇만 송이를 일일이 손으로 따야 겨우 1파운드를 얻을 수 있으니, 이 노란빛 하나에 들어가는 수고가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몇천 년 동안 이 색과 향을 탐냈습니다.

사프란은 최음제로 쓰였으며 치통부터 치석까지 치료하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어떤 것과도 닮지 않고 향과 맛도 빼어나다. 달면서도 쓰고 향긋하며, 밀짚의 향기를 풍겼다가 이내 버섯처럼 숲의 냄새도 풍긴다.

울시 추기경은 접견실 바닥에 사프란을 흩뿌려 공기에 향을 입혔고 클레오파트라는 사프란으로 목욕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희귀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의 욕망이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한정판이나 명품에 보이는 집착도, 결국 사프란 꽃을 쫓던 그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골드 — 손대는 모든 것을 삼키는 색

저자는 금이 줄곧 숭배의 색이자 숭배의 대상이었다고 말합니다. 말리의 황제 만사 무사가 성지순례를 떠나며 금을 너무 많이 풀어 그 지역 금값이 10년 동안 최저를 기록했다는 일화는, 금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끝이 없는지를 보여줍니다.

(어머니 지구의) 내장을 파내려가 금과 은의 핏줄을 캐낸다… 내장을 파내서는 손가락을 장식한다.

손대는 모든 것이 금으로 변하기를 바랐던 미다스 왕 이야기가 떠오르는 구절입니다. 결국 미다스는 먹을 것조차 금으로 만들어버려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정작 중요한 걸 잃어버린다는 교훈은, 투자나 재테크에 마음이 쏠리는 요즘 저에게도 묘하게 뼈아프게 다가왔습니다.

책장을 덮고 나니 색이라는 게 생각보다 훨씬 많은 걸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료 하나, 이름 하나에도 누군가의 죽음과 욕망, 편견과 호기심이 다 들어 있으니까요.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립스틱이나 페인트 색상표의 이름을 보고 괜히 궁금해졌던 분
  • '이 색은 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를 한 번쯤 생각해본 분
  • 역사나 과학, 디자인 이야기를 가볍게 즐기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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