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면 소파에서 넷플릭스를 켜는 게 제일 쉬운 선택입니다. 밖에 나가는 건 괜히 큰일처럼 느껴지고요. 그런데 영국의 박물학자 에마 미첼은 25년 동안 우울증을 앓으면서도 기분이 바닥을 칠 때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숲으로 걸어 나갔다고 합니다. 『야생의 위로』는 그 1년간의 산책을 계절별로 기록한 책입니다.

25년째 우울증 환자입니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지난 25년 내내 우울증 환자였다.
이렇게 담담하게 고백하며 책이 시작됩니다. 우울증을 극복한 사람의 성공담이 아니라, 지금도 우울증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매일 쓰는 생존 기록이라서 오히려 믿음이 갔습니다.
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저 집 밖으로 나가 오두막 맞은편의 가시자두나무와 보리수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면에서 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반응이 일어난다. 보이지 않고 소리도 없는 뇌 내의 화학작용이 나에게 위안과 동시에 치유를 가져다준다.
거창한 등산이나 캠핑 없이 집 앞 나무 몇 그루를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이 의외였습니다. 저는 '자연으로 가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괜히 장비부터 갖춰야 할 것 같아 미뤄왔는데, 이 책은 그냥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말합니다.
산림욕, 과학이 된 산책
2017년 엑서터대학교에서 진행한 연구에 따르면 도시환경 속 식물의 존재는 거주자의 우울증과 불안, 스트레스 인지도를 떨어뜨린다. 야외에서 보내는 시간이 기분 저하를 완화한다는 점도 같은 연구를 통해 확인되었다.
일본에서는 숲을 찾아가는 일이 약국에서 진통제를 받아오는 것만큼이나 흔한 일이라는 대목도 나옵니다. 혈압이 떨어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줄어드는 효과가 실제로 한 달까지 지속된다는데, 도시에서는 같은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니 결국 녹지 자체가 핵심인 모양입니다.
채집 황홀, 낙엽을 줍는 이유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원을 찾아 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일시적인 흥분을 느끼게 한다. 소위 '채집 황홀'이라는 것이다.
저도 산책하다 예쁜 돌이나 단풍잎을 괜히 주머니에 넣고 오는 버릇이 있는데, 그게 수렵 채집 시절부터 내려온 뇌의 보상 작용이라니 묘하게 안심이 됐습니다. 쓸데없는 습관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본능이었던 거죠.
상모솔새를 발견한 순간
상모솔새를 보니 내면에서 익숙한 감각이 솟아난다. 어린 시절 늦여름에 할머니 집 옆에 있는 연못에서 아주 작은 청개구리를 찾아냈을 때, 혹은 퇴비 더미 근처의 쐐기풀 잎 위에서 무당벌레를 찾아냈을 때와 똑같은 아찔하고 짜릿한 느낌이다.
영국에서 가장 작은 새를 우연히 발견한 순간의 흥분을 저자는 이렇게 자세히 묘사합니다. 그 대목을 읽으면서 저는 언제 마지막으로 이런 작은 발견에 들떠본 적이 있었나 되짚어봤습니다. 핸드폰 화면 속 소식보다 눈앞의 벌레 한 마리가 더 큰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게 새삼스러웠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미리 걷기
영국 인구의 20~30퍼센트가 어떤 형태로든 계절성정서장애를 겪는다.
저자는 겨울이 오기 전, 기분이 괜찮은 날에도 미리 산책을 해두면 누적 효과가 생겨서 이후의 급격한 기분 저하가 덜 아찔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날씨가 흐려지고 해가 짧아지는 요즘 같은 계절, 저도 미루지 말고 오늘 잠깐이라도 걸어볼 핑계가 생긴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퇴근 후 집 밖으로 나가는 게 늘 큰일처럼 느껴지는 분
- 해가 짧아지는 계절이면 괜히 기분이 가라앉는 분
- 거창한 여행 대신 동네 산책의 의미를 다시 찾고 싶은 분
'에세이·라이프'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무튼, 양말』, 서랍 속 양말 한 짝이 하루를 바꾸는 방식 (0) | 2026.10.09 |
|---|---|
| 『라틴어 수업』, '있어 보이려고' 시작해도 괜찮은 이유 (0) | 2026.10.07 |
| 『프랑스 여자는 늙지 않는다』, 늙지 않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나이 드는 법 (0) | 2026.09.29 |
| 다시 열어보지 않는 메모장에 대하여 — 《아무튼, 메모》 (0) | 2026.09.28 |
| 쉰 살에 경차로 바꾸고 알게 된 것들 - 《매운 인생, 달달하게 달달하게》 (0) | 2026.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