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본을 뗄 때마다 제 이름이 가장 위에, 제가 세대주로 적혀 있는 걸 당연하게 봅니다. 그런데 이게 당연해진 지 사실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결혼한 여성이 무조건 남편의 호적에 들어가고 자녀는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가던 호주제가 폐지된 게 2005년입니다. 저보다 몇 살 많은 분들은 그 제도 안에서 몇 년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최근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를 읽으면서 제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 중에 처음부터 당연했던 게 거의 없었다는 걸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사회는 흐른다"는 말이 왜 이렇게 허전하게 느껴질까
저자는 대학 강의에서 "우리 여성들에게도 계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당황합니다. 뒤에 이어질 말이 당연히 '없다'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상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 믿어온 근거를 되짚어 봅니다.
역사적 상상력을 그러쥐고 살았다지만 그것은 막연한 감각이자 말 그대로 상상일 뿐, 여성의 지위가 빠르게 개선되었다는 체감도 느낌일 뿐이다.
저도 비슷합니다. 예전보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어렴풋이는 느끼지만 정확히 무엇이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설명하지 못합니다. 역사 교과서에서 전쟁과 혁명의 연도는 꾸역꾸역 외웠는데, 제 바로 위 세대가 겪은 변화는 어디서도 정식으로 배운 적이 없습니다.
호주제가 사라진 건 시간이 지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책은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을 가장 먼저 의심합니다. 그 예로 든 사건이 호주제 폐지입니다. 2005년 헌법재판소는 이렇게 판단했습니다.
호주제도는 헌법상 평등권과 인간의 존엄성 및 이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가족제도에 반한다.
이 한 문장이 나오기까지 이태영 변호사가 가족법 개정을 위해 매달린 시간이 50여 년입니다. 본인은 이 결정을 보지 못하고 1998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호주제 폐지가 저절로 일어난 시대의 흐름이 아니라, 평생을 걸고 매달린 사람들이 밀어낸 결과라는 걸 알고 나니, 지금 제가 누리는 것들 중에 그냥 주어진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동자는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
1976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회사가 매수한 세력에게 노조를 빼앗길 위기에 놓입니다. 수백 명이 모여 항의하자 경찰이 투입됐고 여성의 몸에는 손대지 못한다는 말을 떠올린 이들은 속옷만 남긴 채 스스로 옷을 벗고 팔짱을 꼈습니다. 경찰이 주동자를 내놓으라고 하자 이들은 소리쳤습니다.
주동자는 없다.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
이 투쟁 이후에도 회사는 똥물을 뿌리는 테러를 가했고, 1979년 YH무역 사건에서는 평균 나이 스무 살의 노동자들이 농성하다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이라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습니다. 당시 경찰은 자살이라 발표했지만 나중에 사망 시각과 상처 부위가 그 발표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당연하게 쓰는 월차나 생리휴가 같은 말들이, 이런 싸움을 거치고서야 겨우 생긴 말이라는 걸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기억되지 않으면 이렇게 쉽게 지워집니다
책은 이런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났는데도 왜 우리 대부분은 모르는지를 가장 아프게 짚습니다. 저자는 그 이유를 이렇게 씁니다.
여성의 성취가 운 좋게 기록으로 남는 데까지 성공했다 해도, 그 기록은 빛이 들지 않는 구석자리, 혹은 책장 맨 위칸처럼 손 닿기 어려운 데 놓인다.
환경오염의 위험을 처음 경고한 레이첼 카슨조차, 책을 낸 당시에는 연구 내용보다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먼저 공격받았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역사 인물 중 여성의 이름을 몇이나 댈 수 있는지 세어 봤는데, 생각보다 적어서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이 꽃 선물하는 날은 아니었습니다
3월 8일이 그냥 기념일로 정해진 게 아니라는 것도 이 책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1975년 아이슬란드에서는 여성의 90퍼센트가 하루 동안 집안일과 직장 일을 모두 멈추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당시 인구 22만 명 중 3만여 명이 거리에 모였습니다. 책은 이 흐름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거저는 나아지지 않는다. 그래도 나아진다.
그 파업이 있고 5년 뒤, 아이슬란드는 세계 최초로 직접선거를 통해 여성 대통령을 뽑습니다. 반대로 책은 한때 가장 개방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이 탈레반 집권 이후 여성의 취업과 교육을 전면 금지한 사례도 함께 보여줍니다. 변화는 쌓이기도 하지만 지키지 않으면 되돌아갈 수도 있다는 걸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우리가 쌓은 모래성을 기억하는 일
올해로 강남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10년이 됩니다. 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저자가 처음으로 여성혐오에 침묵하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끝맺습니다.
바람에 쉬이 흩어지는 모래알로 성을 쌓는다. 드디어 성이 되었다 싶었는데 파도가 치니 곧 허물어진다. 애써 쌓은 우리의 성은 이제 흔적이 없다. 이 책은 그 모래성을 복원하는 작업이다.
거창한 역사의식이 아니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제가 당연하게 쓰는 제도나 말 뒤에 누구의 이름과 시간이 있었는지 한 번쯤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하려는 일의 절반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평소 "요즘 세상 많이 좋아졌다"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는 분이라면 그 "좋아짐"이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의 몫이었는지 한 번쯤 따라가 보시길 권합니다. 역사 공부가 지겨웠던 분이라도 이 책은 괜찮습니다. 문제집처럼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구성이라 오히려 교과서보다 훨씬 머리에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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