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를 시작하는 건 쉬운데 끝까지 완성하는 건 늘 어렵습니다. 글을 쓰다 말고, 영상을 찍다 말고, 사업 계획서를 쓰다 말고 접어버린 경험이 저도 여러 번 있습니다. 기자 출신 작가 양유창은 이 질문을 품고 윤태호, 김성훈, 우경민 등 각 분야에서 결과물을 완성해낸 창작자 열 명을 직접 만났습니다. 『세상에 없던 생각』은 그들에게 성공 비결이 아니라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물은 인터뷰집입니다.

어디 가지 않는 것이 상상력의 근원
『미생』을 그린 만화가 윤태호는 아이디어를 얻으러 산에 가거나 카페를 찾아다니지 않습니다. 문하생 때부터 자리를 지키는 습관을 들였기 때문입니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려고 애쓰는 것은 창작자의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창작자들에겐 부지불식간에 무언가가 찾아온다고 믿는다. 고민을 계속 하다 보면 어느 순간 '훅' 찾아온다. 영감을 얻기 위해 어느 산에 간다거나 하지 않고 카페에서 작업하지도 않는다. 화실의 내 자리에 앉아서 쓴다. 문하생 때부터 연습할 때 자리를 피하지 않는 습관을 들였다. 일을 해야 하면 계속 자리에 앉아 있는 거다. 책상에서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고 회피하는 버릇이 생기면 점점 핑계가 늘어난다. 어디 가지 않는 것이 상상력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
책상에서 아이디어가 안 나온다고 자리를 피하는 버릇이 들면 점점 핑계가 늘어난다는 게 그의 말입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오늘은 영감이 안 와서"라며 할 일을 미뤘던 순간들이 떠올라 조금 찔렸습니다.
정리하지 않아야 더 잘 보이는 자료
윤태호는 자료를 에버노트 한곳에 모으되, 폴더로 깔끔하게 분류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흥미롭습니다.
나는 에버노트의 수많은 기능 중 아마도 3%만 쓸 것이다. 그런데 생산성 측면에서는 100% 활용하는 기분이다. (웃음) 자료를 '가나다 순'으로 정리하지 않는 것이 신선한 정보를 계속해서 볼 수 있는 비법인 것 같다.
폴더로 깔끔하게 나눠두면 오히려 그 폴더를 다시 열어보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정리가 완벽할수록 창작자의 눈에서 멀어진다는 역설이 저에게는 꽤 신선했습니다.
회사가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다
5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하나로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은 우경민 감독은 원래 안정적인 회사원이었습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돌아봅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뒤엔 같은 회사 업무도 다르게 보였다. 그동안 해왔던 광고나 게임 영상물을 만드는 일이 결국 내가 상상한 것과 실제 영상물에 대한 갭을 줄여나가는 과정이더라.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는 나에게 최고의 교육기관이었던 셈이다.
같은 일도 "언젠가 내 작품을 만들겠다"는 마음을 품고 보면 전혀 다른 훈련이 됩니다. 지금 하는 일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 한 번쯤 떠올려볼 만한 말입니다.
내가 만든 건 가짜였다
영화 〈끝까지 간다〉로 재기한 김성훈 감독의 데뷔작은 흥행과 평가 모두에서 참패했습니다. 6개월 뒤 그 영화를 다시 본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때 내가 만든 건 가짜였다. 뒤늦게 깨달은 거다.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라 내가 이만큼 알고 있다는 걸 과시하기 위해 만든 영화였다. '아마 이럴 거야' 이렇게 막연하게 상상해 만든 감정들의 나열이었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감정을 관객들이 알아주길 바라고 있더라.
남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일과 나 자신에게 납득시키는 일은 다릅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그럴듯하게 보이려고 애썼던 글이나 말들을 돌이켜보면, 결국 알아보는 사람은 다 알아본다는 걸 느낍니다.
두 번째 기회가 올 때까지
김성훈 감독은 데뷔작 실패 후 8년 동안 돈벌이가 되지 않는 시나리오만 썼습니다. 아이가 둘이었고 통장은 비어갔습니다.
두 번째 기회가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온다면 그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자 하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내와 아이들에겐 미안하지만 시나리오만 썼다. 다른 일은 생각도 안 했다.
버틴다는 것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저 "그때가 오면"을 믿고 매일 같은 자리에 앉는 일이었습니다.
마무리
열 명의 인터뷰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재능이나 운이 아니었습니다. 하기 싫은 날에도 자리를 지키고 자신에게 솔직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실패하고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서는 예전에 『스타트업 생존의 기술』을 소개한 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습니다. 뭔가를 시작했다가 자주 흐지부지되는 분, 지금 하는 일이 쓸모없게 느껴지는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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