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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남산의 부장들』, 대통령을 지키던 정보기관이 결국 대통령을 쏜 그날

by summaries 2026. 10.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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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가끔 "그 사람 뒷조사 좀 해봐"라는 말이 농담처럼 돌아다닙니다. 저도 웃어넘기긴 하지만 실제로 한 나라의 권력기관이 그런 일을 국가 운영의 기본 수단으로 삼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떠올리면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로 30년을 뛰면서 중앙정보부를 추적해온 김충식 저자가 쓴 《남산의 부장들》을 읽으면서 저는 권력이 정보를 독점했을 때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처음 구체적으로 알게 됐습니다.

『남산의 부장들』, 대통령을 지키던 정보기관이 결국 대통령을 쏜 그날 표지

내각도 국회도 다 껍데기였다

저자는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중앙정보부가 가졌던 힘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안보파수꾼·외교주역에서부터 정치공작, 선거조작, 이권배분, 정치자금징수, 미행, 도청(盜聽), 고문 납치, 문학·예술의 사상평가, 심지어 여색(女色)관리, 밀수, 암살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올마이티(almighty)의 권력중추였다.

저는 이 한 문장을 읽고서야 '정보기관'이라는 말이 요즘 제가 떠올리는 이미지와 얼마나 다른지 깨달았습니다. 견제받지 않는 정보력이 쌓이면 그게 곧 모든 권력이 된다는 사실을, 책은 숫자나 설교가 아니라 실제 일어난 일들로 보여줍니다.

두 개의 칼로 서로를 겨누게 하다

박정희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령부라는 두 기관을 늘 나란히 두고 운영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집무중 한가할 때면 청와대에서 볼 때 오른쪽의 궁정동(정보부) 왼쪽의 통합병원(보안사)에 교대로 내려가 쉬곤 했다. 그리고 두 개의 칼이 서로 충성을 겨루고 싸우도록 긴장을 유도했다.

부하들을 서로 경쟁시켜야 통제가 된다는 생각, 회사에서도 비슷한 논리를 들어본 적이 있어 낯설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그 방식이 결국 누구의 목을 겨누게 되는지까지 지켜보게 됩니다.

경호실장과 정보부장의 자존심 싸움

8대 정보부장 김재규와 경호실장 차지철의 반목은 이 책의 중심축입니다. 차지철은 야당 동향을 돈으로 사들여 김재규보다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하며 생색을 냈고 그런 일들이 쌓이면서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버러지 같은 자식’이라고 마지막 순간의 증오가 폭발하기까지 김재규로서는 차지철에 관해 한 많은 사연을 켜켜이 쌓아갔다.

직장에서 두 상사 사이 자존심 싸움에 낀 경험이 있는 분이라면 이 긴장감이 완전히 낯설지는 않을 겁니다. 여기서는 그 감정의 결과가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꿔놓았다는 게 다릅니다.

총성이 울리기 직전의 대화

1979년 10월 26일 저녁 궁정동 술자리에서, 차지철은 부산과 마산의 시위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새끼들, 까불면 신민당이고 학생이고 싹 깔아뭉개버리지

그리고 뒷날 군법회의에서 김재규는 총을 쏘기 직전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각하. 김영삼이는 제명되었습니다. 또 사법조치까지 하면 이중으로 조치하는 것이 됩니다.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하고 흥분해서 쏘았습니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마지막 대화가 이렇게 날카롭고 사소한 말들로 채워져 있었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오래 남았습니다. 거대한 사건의 발화점은 생각보다 작고 인간적인 감정일 때가 많습니다.

"나는 괜찮아", 18년 전과 같은 말

총에 맞은 순간, 박정희를 붙든 가수 심수봉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심수봉이 각하를 붙들고 살필 때 박정희는 “나는 괜찮아”라고 했다. 그것은 놀라운 수미상응(首尾相應)이었다.

1961년 5·16 새벽, 총탄이 날아오는 한강다리를 건너던 박정희 소장도 "괜찮아, 괜찮아"를 되풀이했다고 저자는 기록합니다. 권력을 쥐던 순간과 잃는 순간에 같은 말을 남겼다는 사실이, 역사의 아이러니라는 말로는 다 설명이 안 되는 느낌을 줍니다.

정보로 세운 정권은 정보로 무너졌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저자의 시선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됩니다.

그 박정희 시대는 중앙정보부가 열었다. 3선개헌, 유신개헌의 견인차도 정보부였다. 그리고 마침내 10ㆍ26암살로 그 시대를 닫아버린 것도 정보부였다.

정보를 틀어쥐고 권력을 지키려 했던 구조가, 그 내부의 균열 때문에 스스로 무너졌다는 이야기입니다. 견제 없는 권력이 자기 자신조차 견제하지 못하게 된다는 걸 이 책은 소설보다 더 생생한 실제 기록으로 보여줍니다.

현대사 교과서 몇 줄로만 알고 있던 10·26을 사람들의 표정과 말투까지 느껴지게 읽고 싶은 분, 권력기관이 왜 늘 견제받아야 하는지 실감나는 사례로 이해하고 싶은 분이라면 이 책을 권합니다. 꽤 두껍지만 읽는 동안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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