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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착한 남자'인 나도 몰랐던 것 — 『맨박스』가 건네는 질문

by summaries 2026.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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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답게 좀 굴어." 이 말, 살면서 한 번쯤 들어보거나 써본 적 있을 겁니다. 저도 어릴 때 넘어져 울면 이 말을 들었고 커서는 후배나 조카에게 비슷한 말을 쓴 적이 있습니다. 반가정폭력 운동가 토니 포터는 이 말의 뿌리를 '맨박스'라고 부르고 거기 갇힌 남자들의 이야기를 책 한 권에 풀어놓습니다.

『맨박스: 남자다움에 갇힌 남자들』이 특이한 건, 저자가 '나쁜 남자'가 아니라 자신을 포함한 '착한 남자'들에게 말을 건다는 점입니다.

'착한 남자'인 나도 몰랐던 것 — 『맨박스』가 건네는 질문 표지

맨박스, 이름 붙여진 감옥

'맨박스'는 남자아이가 자라면서 은연중에 배우는 규칙들의 총합입니다. 울면 안 된다, 도움을 청하면 안 된다, 여자보다 약해 보이면 안 된다 같은 것들이요. 누구도 대놓고 가르치지 않지만 다들 자연스럽게 따라 합니다.

사회적으로 강요된 남성성 규범인 맨박스를 통해 소년들은 ‘진짜’ 남자란 이런 것이라고 배운다. 맨박스의 가르침에 별다른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배운 대로 행동하는 이들 대부분은 사실 평범한 남성일 확률이 높다.

저는 이 대목에서 뜨끔했습니다. 제가 지켜온 '남자다운' 습관들 중에 스스로 골라서 선택한 게 몇 개나 될까 싶었거든요. 따져보니 거의 다 어디선가 물려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침묵도 공모라는 것

이 책에서 가장 무거운 대목은 포터가 열두 살 때 겪은 일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옮기지 않겠습니다. 요지만 말하면, 그는 이웃에 살던 지적장애 소녀가 또래 남자아이들에게 이용당하는 상황을 목격하고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직접 손대지 않았으니 죄가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수십 년을 지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지킨 침묵은 조니가 하는 짓이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무언의 승낙이었다. 이런 암묵적 합의는 사회적으로 학습되는 사고방식인데, 말하자면 ‘직접 벌인 일만 아니면 괜찮다’는 뜻이다.

포터가 이 일화를 꺼낸 건 자기 단죄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나쁜 놈'과 '착한 남자'를 가르는 기준이 얼마나 헐거운지 보여주려고요.

울음을 허락받지 못한 아이들

포터는 아들 켄덜이 다섯 살 때 울음을 그치라고 다그쳤던 순간을 떠올립니다. 딸이 울면 무릎에 앉혀 다독였으면서 아들에게는 방에 들여보내 '정신 차리고' 나오라고 했다는 겁니다.

남자는 강하고 여자는 약하다고 배웠다. 분노를 제외한 모든 감정은 억누른 채로 살고, 아무리 힘들어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배웠다.

저도 조카들에게 비슷한 짓을 합니다. 남자 조카가 울면 "괜찮아, 뚝"부터 나오고 여자 조카는 그냥 안아주게 되더군요. 이 책을 읽고서야 그 차이의 출처를 알 것 같았습니다.

여자는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는 낡은 계약

포터는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가 딸의 손을 신랑에게 건네는 관습부터 짚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 여성을 누군가에게 속한 존재로 생각한다는 겁니다.

여성이 폭력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폭력을 쓰는 남성뿐만 아니라 일반 남성들마저도 무의식적으로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에는 이런 상담 기법이 나옵니다. 낯선 사람이 여자를 때리는 걸 봤을 때와, 커플로 보이는 두 사람 사이에서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앞의 경우엔 대부분 바로 나서겠다 하고 뒤의 경우엔 '남의 사정'이라며 물러선다고 합니다.

"제 침묵이 허락이었다는 걸 몰랐습니다"

책 중반에는 포터가 세션에서 만난 남자들의 고백이 여럿 나옵니다. 존이라는 남자는 여자를 때리거나 소리 지른 적이 없다면서도 그런 친구들을 본 적은 많은데 한 번도 말린 적이 없다고 인정합니다.

제 침묵이 다른 남자들에게는 그들의 폭력 행위를 지속해도 된다는 허락을 의미했단 걸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존의 말은 앞선 포터의 고백과 겹칩니다. 폭력을 쓰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지켜보고도 넘어가는 순간들이 쌓여 지금의 문화를 만들었으니까요.

여덟 명이 두 명에게 해야 할 말

포터가 활동하는 단체 ACTM은 통계 하나를 자주 인용합니다.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을 실제로 저지르는 남성은 전체의 15~20% 정도, 나머지 여덟 명은 그러지 않습니다. 포터는 이 여덟 명이 나머지 두 명에게 "그러지 마라"고 말하는 게 가장 확실한 변화의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대략 15~20%의 남성들이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 성폭력을 저지릅니다. 열 중 여덟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우린 이 여덟 명의 남성이 다른 두 명에게 폭력을 쓰지 말라고 말하면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포터는 이 활동의 밑바탕을 '남성의 해방은 여성의 해방과 직결되어 있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여성을 지켜주는 일은 남자에게서 뭔가를 빼앗지 않습니다. 강한 척하느라 지쳐온 남자들도 함께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이 책은 이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 딸과 아들을 키우면서 나도 모르게 다르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궁금한 부모
  • "착한 남자"라는 말에 은근히 안심해온 남성 독자
  • 가정 폭력이나 성폭력 문제를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로 이해하고 싶은 사람
  • 침묵과 방관이 어떻게 문제를 지속시키는지 곱씹어보고 싶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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