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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역사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 지하철에서 가슴을 맞고도 아무 말 못 하는 이유

by summaries 2026.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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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지하철에서 문이 열리자마자 뒤에서 어깨를 세게 밀고 나가는 사람을 만난 적, 다들 한 번쯤 있으실 겁니다. 그 순간엔 화가 나다가도 "요즘 다들 그렇지 뭐" 하고 넘어가곤 합니다. 독일 저널리스트 악셀 하케의 『무례한 시대를 품위 있게 건너는 법』(쌤앤파커스)을 읽으면서 저는 그 "다들 그렇지 뭐"라는 한마디가 얼마나 많은 걸 덮어버리는지 생각했습니다.

"먼저 내리면 타라고!" —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것

이 책의 한국어판에는 변호사 김예원 씨가 쓴 발문이 실려 있는데, 거기 나온 장면 하나가 오래 남았습니다. 출근길 지하철 플랫폼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이건 명백히 폭행이다. 주변을 살피니 CCTV가 보인다. 빨리 증거를 확보하면 형사 고소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지하철 안은 고요했고 내 앞에 섰던 그 남성은 굳은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서 있었다.

가슴팍을 맞은 사람도, 그걸 지켜본 사람도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갔다는 대목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저도 비슷한 장면 앞에서 "됐다, 그냥 가자" 하고 넘긴 적이 많았으니까요. 이 책은 바로 그 "그냥 넘어가는 순간들"을 붙잡고 늘어지는 책입니다.

맥주 한 잔에서 시작된 질문

저자는 친구와 술집에서 맥주를 마시다가 품위를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친구가 환경 문제로 보이콧 중인 양조 업체의 맥주를 두 번째 잔부터는 시키지 않는 걸 봤습니다. 대단한 신념의 선언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다른 맥주를 고르는 태도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으면서 일상과 삶 속에서 자신보다 권리가 낮은 이들을 고려하는 것.

품위라고 하면 거창한 도덕률을 떠올리기 쉬운데, 저자가 말하는 품위는 이렇게 작습니다. 남이 보든 안 보든, 손해를 보든 말든 한 번 더 생각해보는 습관에 가깝습니다.

식탁 위에 나란히 놓인 휴대폰과 태블릿

저자는 식당에서 한 남자를 지켜본 이야기를 꺼냅니다. 가족과 함께 왔으면서도 휴대폰과 태블릿을 앞에 세워두고 대부분의 시간을 거기에 쓰는 남자였습니다. 친구와 이 장면을 두고 한참 논쟁을 벌이다 이런 말에 다다릅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를 고립시키고 개별화시켜서 함께 있어도 고독하게 만들지.

저도 밥을 먹다가 무심코 휴대폰을 집어 든 적이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게 잘못이라기보다,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반쯤은 다른 곳에 가 있는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한 번쯤 세어볼 필요는 있겠다 싶었습니다.

이름을 감추면 못할 말이 없어지는 이유

저자는 드레스덴에 설치 미술 작품을 세운 한 예술가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몰린 욕설을 한 시간 넘게 읽다가 결국 창을 닫아버린 경험을 씁니다. 그러면서 가명 뒤에 숨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렇게 짚습니다.

가공의 이름 뒤에 숨게 되면 평소에는 결코 하지 않을 일들을 공공연하게 행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모욕하고 헐뜯으며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악플 문제는 한국에서도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흥미롭게도 저자는 이걸 특정 몇몇 나쁜 사람들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실명이든 익명이든, 화면 너머의 상대가 지워지는 순간 누구나 그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걸 인정하고 시작합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화를 낼까

저자는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의 졸업식 축사를 빌려, 사람에게는 '기본 설정 값'이 있다고 말합니다. 퇴근길 마트 계산대 앞에 줄을 서면 저절로 떠오르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온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며 나 외에 다른 모든 사람들을 ‘내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만 여겨 ‘대체 이 자들은 누구기에 나를 가로막을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저도 지친 퇴근길에 앞차가 조금만 느려도 속으로 욕부터 나올 때가 있습니다. 저자는 이걸 나쁘다고 나무라지 않습니다. 대신 그게 '기본값'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서 한 번 벗어나 보려는 선택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앞자리를 새치기한 사람에게도 사정이 있다면

저자는 이 '다르게 보기'를 자기 나름의 예로 풀어냅니다. 마트에서 앞자리를 가로챈 사람, 장바구니를 낚아챈 사람을 상상하며 이렇게 적습니다.

마트의 치즈 코너에서 부끄러움도 모른 채 사람들을 밀치며 앞자리를 차지한, 어딘가 지저분하게 보이는 저 여성은 어쩌면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그 추측이 늘 맞을 리는 없습니다. 다만 이렇게 한 번 다르게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그 순간의 내 분노는 조금 누그러집니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나 자신을 그 분노에서 꺼내주는 일에 가깝습니다.

그래도 품위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

책의 끝부분에서 저자와 친구는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로 돌아옵니다. 그 책임의 대상은 나와 잘 맞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적어도 우리는 이들을 존중할 책임이 있다. 또한 이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 인정과 배려 그리고 호의와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

거창한 결심처럼 들리지만, 저자가 실제로 하는 일은 소박합니다. 맥주 한 잔을 고를 때, 식탁에서 휴대폰을 내려놓을 때, 댓글 하나를 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 때. 품위는 그런 순간들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이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 요즘 들어 부쩍 뉴스나 댓글창을 보면 화부터 나는 분
  • 가족과 식사 자리에서 각자 휴대폰만 들여다보는 게 마음에 걸리는 분
  • 무례한 사람을 마주친 뒤에도 뭐라 하지 못한 자신이 답답했던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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