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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즐기고 보련다』, 노후 준비는 계좌부터가 아니다

by summaries 2026.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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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신중년 대상 노후준비 특강에서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돈만 준비해서는 부족하다." 요즘 2030세대 여덟 명 중 한 명은 벌써 주식과 채권으로 노후자금을 굴린다고 하니, 준비성 하나는 다들 빠릅니다. 그런데 정작 은퇴 이후의 하루하루를 채우는 건 계좌 잔고만이 아닙니다. 그 시간을 무엇으로, 어떤 몸과 마음으로 살아낼 것인가. 이 질문이 그만큼 무겁습니다. 황안나 작가의 에세이 『일단은 즐기고 보련다』를 다시 꺼내 읽은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예순여덟, 피레네 산맥 앞에 서다

저자는 예순여덟 살이던 2007년 9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800킬로미터를 걷기로 결심합니다. 노년의 몸으로 감당하기엔 무리해 보이는 결심이었지만 망설임은 짧았습니다.

"내 나이 예순여덟 살이던 2007년 9월 3일. 꿈에 그리던 스페인으로 떠나기 위해 마드리드 직항 비행기에 올랐다."

순례자증을 발급하던 직원이 나이를 보고 휘파람을 불었다는 대목에서 웃음이 났습니다. 은퇴 이후를 준비한다는 게 결국 이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몸이 허락하는 순간을 미루지 않고 붙잡는 태도 말입니다.

행복은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몫

순례길에서 저자는 일흔셋 독일 할머니를 만납니다. 걸음이 너무 느려 함께 걸을 친구도 없다는 할머니였습니다.

"자기는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정말, 정말 행복하다고 했다. 행복이란 누릴 줄 아는 사람의 몫이란 생각이 들었다."

속도도 동행도 없이 홀로 걷는 그 길이 왜 행복한지 처음엔 이해가 잘 안 됐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행복은 조건이 갖춰진 다음에 오는 게 아닌가 봅니다. 지금 걷는 이 걸음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되는 것이겠지요. 노후를 대비한다면서 정작 지금 이 하루를 누리는 법은 잊고 사는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15년째 새벽 5시 40분

저자는 매일 새벽 5시 40분에 헬스장으로 나갑니다. 15년째 변함없는 루틴입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동안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건강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문장도 눈에 박혔습니다. 노후 자금을 굴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의 체력도 똑같이 굴려야 한다는 뜻으로 읽었습니다. 장수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시간의 질이 목표라는 말은 재무 설계서 어디에도 안 나오는 계획표 같았습니다.

나도 내 나이만큼 아프다

늘 바쁘게 돌아다니는 저자를 사람들은 아픈 데 없는 무쇠 같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저자는 척추 협착증과 목 디스크를 안고 삽니다.

"죽는 날까지 안고 가야 할 지병(持病)인 것이다."

비 오는 날 걸려온 안부 전화에 저자는 "그냥 내 나이만큼 아파요!"라고 답합니다. 아프지 않은 척 버티는 대신 아픔을 나이만큼의 몫으로 인정합니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편안합니다. 노후를 상상할 때 흔히 건강을 잃지 않는 그림만 그립니다. 그런데 이 책은 아픔과 함께 걸어가는 법도 준비의 일부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예순여섯에 첫 책을 낸 사람

저자의 꿈은 원래 작가였습니다. 아버지가 쓰러지면서 대학 진학을 접고 교사의 길을 걸었지만 글쓰기는 놓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순여섯 살에 국토종단 여행기로 첫 책을 냅니다. 진로를 고민하는 손녀에게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좋아하는 걸 하며 사는 게 최고의 행복이야. 어디든 길은 있어."

"꿈을 이루는 길은 어디에나 있었던 것이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은퇴는 꿈을 접는 나이가 아니라 미뤄뒀던 꿈을 다시 꺼내는 나이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가 몸으로 증명해 보인 셈입니다.

여덟 명 중 한 명이 주식과 채권 계좌를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계좌를 채운 다음, 나는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이 책은 그 답을 재무제표에서 찾지 않습니다. 산티아고의 흙길, 새벽 5시 40분의 러닝머신, 손녀에게 건넨 한마디에서 찾습니다. 당신의 노후 준비 목록에는 지금 몇 번째 줄에 '몸'과 '꿈'이 적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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