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날 통장에 돈이 들어왔다가 며칠 만에 카드값으로 다 빠져나가는 걸 보신 적 있나요. 저도 매달 이 패턴을 반복하면서 "분명 이번 달엔 아낀 것 같은데" 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공인회계사 손봉석 작가의 『빚, 정리의 기술』을 읽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제가 이상하다고 느낀 그 돈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라, 애초에 제 돈이 아니었던 거였습니다. 이미 빚으로 잡혀 있던 돈이 제자리를 찾아간 것뿐이었죠.
이 책은 자극적인 재테크 비법을 다루지 않습니다. 회계사로 수많은 기업과 개인의 재무 상태를 살펴본 저자가 빚을 회계적으로 정직하게 들여다보자고 제안하는 책에 가깝습니다.

대출금만 빚이 아닙니다
저자는 가장 먼저 우리가 빚을 너무 좁게 정의한다고 지적합니다. 은행 대출이 없으면 빚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회계의 눈으로 보면 신용카드, 보험료, 심지어 지금 타고 있는 자동차의 감가상각비까지도 전부 빚의 범주에 들어갑니다.
회계에서는 빚을 말할 때 직접 상환의무를 지는 채무와(Debt) 현재와 미래에 상환해야 할 부채(Liability)까지 모두 포함하여 본다. 즉 빚은 내가 미래에 갚아야 할 모든 것으로 정의된다.
저도 이 대목에서 제 차를 떠올렸습니다. 대출 없이 현금으로 산 차라 빚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몇 년 뒤 이 차를 바꿀 때 들어갈 돈을 지금부터 모아두지 않았다면 그건 이미 미래의 저에게 빚을 떠넘기는 셈이더군요.
좋은 빚과 나쁜 빚을 가르는 기준
책은 빚 자체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빚이 돈을 벌어다 주는지, 아니면 돈을 쓰기 위한 것인지를 기준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부자는 돈을 벌기 위해 빚을 내고 가난한 자는 돈을 쓰기 위해 빚을 낸다.
저자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좋은 빚이라도 상환 능력을 넘어서면 그 순간 나쁜 빚으로 바뀐다는 겁니다. 최악의 경우를 가정했을 때도 지금의 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인가, 이 질문 하나로 많은 게 정리됩니다.
열심히 사는데 왜 빚이 늘어날까요
이 책에서 가장 뜨끔했던 대목입니다. 경기 탓, 정책 탓을 하기 전에 빚이 늘어나는 근본 원인은 생각보다 단순하다고 말합니다.
빚 문제는 지출을 줄이고 욕심을 줄여야 해결된다. 수입을 늘리는 것은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다.
수입을 늘리려고 애쓸수록 씀씀이도 같이 커진다는 겁니다. 맞벌이 가정이 외벌이보다 저축액이 적은 경우가 흔한 이유가 여기 있다고요. 부수입이 생기면 그만큼 씀씀이가 늘어나는 걸 저도 겪어봐서 이 대목만큼은 변명할 말이 없었습니다.
노란불이 켜졌는데 액셀을 밟고 있지는 않나요
저자는 부채에도 신호등이 있다고 봅니다. 노란불은 멈출 준비를 하라는 신호인데, 정작 그 순간 사람들은 속도를 더 냅니다.
노란불은 멈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신호이다. 노란불은 금방 바뀐다. 이처럼 위기는 단기간 내에 빠르게 온다.
저자의 다섯 살 딸이 "노란불일 때는 빨리 가야 해요"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나오는데, 웃으면서도 뜨끔했습니다. 소득이 줄거나 자산 가격이 흔들리는 조짐이 보이는데도 "설마 나한테"라는 생각으로 지출을 줄이지 않는 게 딱 그 모습이니까요.
먼저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삽니다
지출을 줄이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저자가 제시하는 건 딱 하나, 순서를 바꾸는 겁니다. 쓰고 남은 돈을 저축하는 게 아니라, 먼저 떼어놓고 남은 돈으로 생활하라는 거죠.
‘선(先)지출 후(後)저축’과 ‘선(先)저축 후(後)지출’은 동일한 수학방정식 같지만 결과는 완전히 다른 심리경제학이다.
말로는 간단한데 실천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데 저자가 덧붙이는 조언이 의외로 실용적이었습니다. 카드 대신 현금이나 수표를 쓰고, 일부러 좀 먼 은행을 이용하라는 겁니다. 돈 쓰기가 조금 불편해질수록 저축은 오히려 쉬워진다고 하네요.
빚 통장을 만들고 자동이체를 걸어두세요
이 책에서 가장 실천 가능한 제안은 '빚 통장'입니다. 세금, 카드값, 자동차 교체비용, 노후자금처럼 언젠가는 반드시 나갈 돈마다 통장을 따로 만들어 이름을 붙이고, 만기를 그 지출 시점에 맞춰두는 방식입니다.
정리하면 빚 통장을 만들고 그쪽으로 매월 자동이체하며 만기가 되면 빚을 갚고 다시 똑같은 통장을 갱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의지력에 기대지 말고 시스템에 맡기라는 이야기입니다. 매달 새로 결심하는 것보다 한 번 만들어두고 잊어버리는 쪽이 훨씬 오래간다는 걸 저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구체적인 형태로 만들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이 책은 이런 분들께 권하고 싶습니다.
- 월급은 늘었는데 통장에 남는 돈은 그대로인 분
- 내가 가진 빚이 정확히 얼마인지 한 번도 계산해본 적 없는 분
- 대출이나 카드값을 갚으면서도 왜 갚아야 하는지 실감이 잘 안 나는 분
- 의지력보다 시스템으로 돈을 관리하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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