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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경영

『달러의 역설』, 반도체 전쟁 뒤에는 사실 화폐 전쟁이 있었다

by summaries 2026. 9.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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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빚을 진 나라다. 정부는 재정 적자를, 가계와 기업은 무역 적자를 해마다 갈아치운다. 그런데 달러는 왜 휘청거리지 않을까. 오히려 위기가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달러를 더 사들인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는 일이다. 빚이 많은 나라의 화폐라면 값이 떨어져야 정상이니까. 정필모 기자의 『달러의 역설』이 파고드는 게 바로 이 현상 하나다. 최근 미국이 중국을 향해 인공지능 반도체 수출을 더 강하게 틀어막는다는 뉴스를 보다가 이 책이 떠올랐다. 2015년에 나온 책인데 비슷한 장면이 이미 들어 있다. 무대만 반도체로 바뀌었을 뿐, 각본은 낯설지 않다.

빚을 져도 무너지지 않는 나라

저자가 책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렇다. 세계 경제 위기의 진원지는 늘 미국인데, 정작 그 대가는 다른 나라들이 더 크게 치른다. 순리에 맞지 않는 이 현상을 그는 제목 그대로 역설이라 부른다.

이 같은 역설이 가능한 미국 경제의 힘은 세계의 기축통화 ‘달러’에서 나온다. 달러가 기축통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정치ㆍ경제ㆍ군사력 덕분이다.

'경제력'만 말하지 않았다. 정치력과 군사력이 나란히 붙어 있다. 화폐의 값어치를 지탱하려면 총과 표가 함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환율 뉴스를 볼 때 흔히 빠뜨리는 부분이다.

기축통화는 원래부터 힘의 증명서였다

그리스 드라크마에서 영국 파운드까지. 책의 초반부는 기축통화의 역사를 차례로 훑는다. 화폐사 강의처럼 읽히지만 저자의 초점은 다른 데 있다.

기축통화의 역사는 경제 패권의 역사만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기축통화국은 대부분 정치ㆍ군사적으로도 세계를 지배했다.

파운드가 물러나고 달러가 그 자리를 차지한 것도 2차 대전 승전국의 지위와 겹친다. 화폐는 그 나라가 세계 질서를 얼마나 좌지우지하는가를 적은 성적표에 가깝다. 지금 벌어지는 반도체 공급망 재편도 같은 성적표를 다시 쓰는 싸움이다.

대마불사라는 오래된 믿음

'대마불사'. 책에서 가장 인상 깊게 읽은 표현이다. 바둑에서 큰 말은 쉽게 죽지 않는다는 그 말을 저자는 국제 금융에 그대로 가져다 썼다.

“빚을 많이 질수록 망하지 않는다”는 ‘대마불사’의 신화가 존재하는 한, 미국의 막대한 적자와 부채에도 불구하고 달러 가치가 오르는 ‘달러의 역설’은 계속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불안할수록 오히려 달러로 돈이 몰린다. 아이러니 같지만 따지고 보면 믿음의 문제여서 미국이 망하면 다 같이 망한다는 두려움이 클수록 아무도 먼저 달러를 놓지 못한다. 반도체 규제도 이 믿음의 틀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미국이 기술 우위를 계속 쥐고 있어야 저 믿음도 흔들리지 않는다.

위안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렇다면 중국은 어떨까. 저자는 위안화가 달러를 대신할 가능성을 냉정하게 짚는다. 무역흑자국인 중국은 이 조건과 정반대로 움직인다.

중국은 무역수지와 무역 외 수지를 합한 경상수지는 물론 자본수지도 흑자를 내고 있다. 흑자는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이 아니라 흡수하는 것이다. 이는 위안화가 유동성 측면에서 기축통화가 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축통화가 되려면 그 나라가 적자를 내면서 세계에 돈을 풀어줘야 한다. 그런데 흑자로 성장해온 중국이 스스로 적자국이 되기를 택할 리 없다. 저자는 유동성, 안정성, 신뢰성, 태환성, 보편성 다섯 조건을 하나씩 짚으며 위안화가 아직 멀었다고 결론짓는다.

미국의 '중국 때리기', 겉과 속이 다르다

그런데도 미국은 끊임없이 위안화를 절상하라고 압박해왔다. 저자는 이 압박의 속내를 스티븐 로치의 칼럼을 빌려 뒤집는다.

“미국의 막대한 무역 적자를 불러온 직접적인 원인은 사상 유례없이 저축률이 떨어졌기 때문”

미국이 스스로 과잉 소비를 해왔다는 게 로치의 진단이다. 중국 탓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래 놓고 미국은 위안화 절상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강한 달러를 원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모순에서 미국의 진짜 목표를 읽어낸다.

미국의 궁극적인 목표는 강한 달러에 기반을 둔 ‘팍스 달러리움’의 유지다.

미국은 위안화가 오르는 속도를 못 견딘다. 달러의 자리를 흔들 만큼 빨라지면 곤란하다. 지금의 반도체 규제도 비슷한 결로 읽힌다. 중국의 기술 발전을 미국이 정한 속도와 범위 안에 묶어두겠다는 쪽에 가깝다.

TPP 대 RCEP, 봉쇄의 다른 이름

TPP와 RCEP의 대결을 다룬 대목이 지금 뉴스와 가장 크게 겹친다. 저자는 이 무역협정 경쟁을 화폐 패권 다툼의 연장선으로 본다.

중국의 정치ㆍ경제적 위상이 높아지는 것은 기축통화국 미국에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맞서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 계속 지도적 위치를 잃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

당시 전선이 관세와 시장접근 규칙이었다면 지금은 첨단 반도체 장비와 설계자산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무기가 바뀌었을 뿐 목적은 같다. 저자는 심지어 미국의 최종 노림수까지 짚어낸다.

중국의 미국화는 달러가 세계의 기축통화 지위를 계속 유지하는 가장 좋은 전략이다.

미국이 짜놓은 규칙 안으로 중국을 편입시키는 쪽이 최선이다. 완전한 배제는 목표가 아니다. 봉쇄와 포섭은 같은 전략의 양면이다.

그래서 저자가 내놓는 처방

책은 이 불안한 균형을 그대로 두라고 말하지 않는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뜻밖에도 아주 오래된 원칙으로 돌아가자고 제안한다.

브레튼 우즈 체제의 기본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즉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는 것이다.

자본이 국경을 넘나드는 속도를 조금이라도 늦춰야 투기적 충격을 줄일 수 있다는 논리다. 저자가 내미는 처방은 낡은 규율로 돌아가자는 쪽이다. 화려한 신기술도, 새로운 기축통화도 아니다. 그 점이 흥미롭다.

10년 전 책이 지금도 유효한 이유

이 책은 2015년에 나왔다. 인공지능이나 반도체 수출통제 같은 단어는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도 낡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저자가 파고든 대상이 개별 사건이 아니라 구조이기 때문이다. 기축통화국은 자기 지위를 지키려고 시대마다 다른 도구를 꺼내 든다. 환율 압박이든 무역협정이든 수출통제든, 결국 같은 문제를 풀고 있는 셈이다. 경제 뉴스를 볼 때 사건 하나하나에 놀라기보다 그 뒤에 반복되는 패턴을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다. 환율이 왜 이렇게 움직이는지 답답했던 사람, 미중 갈등 기사를 볼 때마다 맥락이 헷갈리던 사람이라면 특히 그렇다. 다음번에 비슷한 뉴스를 마주할 때, 이번엔 어떤 낡은 각본이 반복되고 있는 걸까 한 번쯤 되물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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