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투자 리포트를 읽다 보면 숫자가 빽빽한데도 정작 기억에 남는 건 "이 회사는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다"라는 한 줄짜리 이야기인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어떤 종목을 살지 고민할 때 재무제표보다 그 회사에 대한 스토리에 먼저 마음이 기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뉴욕대 경영대학원에서 가치평가를 가르치는 애스워드 다모다란 교수의 『내러티브 앤 넘버스』는 바로 이 지점, 스토리와 숫자 사이의 긴장을 정면으로 다룹니다.

스토리텔러 부족과 넘버크런처 부족
저자는 사람을 둘로 나눕니다. 이야기로 생각하는 '스토리텔러' 부족과 숫자로 생각하는 '넘버크런처' 부족. 자신은 평생 넘버크런처였다고 고백하면서도 가치평가를 하다 보니 숫자만으로는 설득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스토리가 뒤를 받쳐주지 않는 가치평가는 영혼과 신뢰성이 없으며, 스프레드시트보다는 스토리가 기억에 더 잘 남는다는 것이다.
저도 회사에서 보고서를 쓸 때 숫자만 늘어놓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거기에 맥락 있는 한 문장을 붙이면 다들 그 문장을 기억한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숫자가 틀리지 않았어도 스토리가 없으면 그냥 흩어져버리지 않나 싶습니다.
페라리는 왜 매출 성장률이 낮을까
저자는 페라리의 기업공개를 예로 듭니다. 매출 성장률 4퍼센트, 영업이익률 18.2퍼센트 같은 숫자만 던지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페라리는 희소성을 지키려고 일부러 적게 판다"는 이야기만 하면 그럴듯하지만 정작 주가를 매길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저자는 숫자와 스토리를 엮어야 비로소 둘 다 힘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숫자는 체계적인 평가를 가능하게 해주지만, 스토리가 받쳐주지 않는 숫자는 원칙과 체계가 아니라 위협과 편향의 무기가 된다.
생각해보면 뉴스에서 어떤 지표가 나올 때마다 그 숫자 자체보다 그걸 어떤 맥락으로 설명하는지에 따라 받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같은 실업률 숫자도 누가 어떤 이야기에 붙이느냐에 따라 희망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읽히니까요.
왜 숫자보다 이야기가 오래 남을까
저자는 스토리가 기억에 오래 남는 이유를 뇌과학 연구로도 뒷받침합니다. 같은 내용을 스토리로 읽은 사람과 설명문으로 읽은 사람을 비교한 실험을 소개합니다.
스토리로 내용을 읽은 피험자는 설명문을 읽은 피험자보다 내용을 50퍼센트 더 잘 기억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학창 시절 외운 공식은 다 잊었는데, 선생님이 중간에 들려준 일화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숫자를 외우라고 압박하는 것보다 그 숫자가 왜 중요한지 이야기로 풀어주는 게 더 오래가는 교육인 것 같습니다.
스티브 잡스의 스토리도 결과를 보장하지 않았다
저자는 스티브 잡스를 비즈니스 스토리텔링의 대가로 꼽으면서도 1984년 매킨토시 발표의 스토리가 그 자체로 성공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고 짚습니다. 오히려 그 스토리의 교훈을 가져가 윈도를 재설계한 쪽은 마이크로소프트였습니다.
좋은 스토리텔링은 사업 구축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지만, 아무리 매력적인 스토리일지라도 부와 보상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교훈을 알려주는 사례다.
매력적인 설명과 실제로 작동하는 사업은 다른 문제라는 말에 뜨끔했습니다. 좋은 발표, 좋은 피칭을 본 뒤 "저 회사는 잘되겠다"고 생각했다가 몇 년 뒤 그 회사가 사라진 경우를 저도 몇 번 본 적이 있습니다.
이야기에 취한 순간이 가장 위험하다
책의 후반에서 저자는 스토리텔링의 어두운 면도 분명히 짚습니다. 좋은 스토리에 몰입할수록 사람은 의심을 내려놓고 바로 그 틈을 사기꾼들이 파고든다는 것입니다.
스토리텔링의 대가들은 우리가 감정에 취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우리가 이성적 사고의 흐름을 잃고, 그들의 의도에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투자 사기 뉴스를 볼 때마다 피해자들이 왜 그렇게 쉽게 속았을까 싶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그게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좋은 스토리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마음이 움직일수록 숫자를 한 번 더 확인해봐야 하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은 투자서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어떤 결정을 왜 내리는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에게 추천합니다.
- 주식이나 사업 설명을 들을 때 숫자보다 이야기에 먼저 마음이 기우는 분
- 매력적인 피칭과 실제로 성공하는 사업을 구분하는 기준이 궁금하신 분
- 투자든 창업이든,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자신이 왜 그 결정에 끌리는지 점검하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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