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금요일이 추석입니다. 표를 잡은 사람과 놓친 사람은 이미 갈렸을 겁니다. 이런 주에 신영복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펼쳤는데, 추석 이야기가 생각보다 자주 나옵니다. 저자가 1969년부터 1988년까지 감옥에서 아버님, 어머님, 계수님, 형수님께 보낸 편지를 모은 책이니 명절이 빠질 수 없었겠지요. 1998년 증보판 서문은 이 책을 '우리 시대의 고전'이라 부르고 저자의 옥중 세월을 '20년 20일'이라고 적습니다. 오늘은 이 책의 추석 편지들을 읽어 보려 합니다.
고향 가는 길을 저자는 이렇게 봅니다
1987년 10월 5일자 「추석」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추석이 다른 명절과 다른 점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자는 6, 70년대의 급속한 산업화로 많은 사람이 고향과 가족을 떠나 객지에서 살게 되었다고 짚습니다. 그래서 해마다 역과 버스터미널에 귀성 인파가 몰린다고요. 그 행렬을 바라보는 시선이 독특합니다.
객지에서 고향으로 향하는 숱한 행렬은 흡사 뒤틀린 몸뚱이를 뒤척여 본래 자리로 돌이키려는 몸부림입니다.
막히는 고속도로를 떠올리면 짜증부터 나는데, 저자는 그 줄을 뒤틀린 몸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움직임이라고 봅니다.
표 한 장 끊지 못하는 사람들
편지는 여기서 방향을 틀어 그 행렬에 끼지 못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추석이 다가와도 열차표나 고속버스표 한 장 끊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함께 지내는 수인들에게 물어보면 열에 일고여덟은 추석 때의 괴로웠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고향 마을 입구까지 갔다가 먼발치에서 동네 지붕만 바라보고 발길을 돌렸다는 이야기, 밤중에 고향집 담 너머로 돈지갑을 던져 넣고 도망쳐 왔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저자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것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라기보다 차라리 고향을 잃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떠난' 것과 '잃은' 것은 다르다는 구분이 아프게 남았습니다. 요즘도 일하느라, 갈 집이 없어서, 가도 마음이 편치 않아서 못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귀성객이 한 사람도 없는 추석
저자는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만약 추석 명절에 귀성객이 한 사람도 없다면 어떨까. 역이나 터미널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 그런 추석이란, 생각만 해도 삭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고는 귀성 인파를 다시 보자고 제안합니다.
추석 명절의 엄청난 귀성인파는 이를테면 우리 사회 속에 구조화되어 있는 소외의 외화체(外化體)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는 공동체의 몸부림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이 어렵지만 풀어 보면 이런 뜻으로 읽힙니다. 고향과 떨어져 사는 사회가 만든 모습이면서 그 떨어짐을 메우려는 사람들의 힘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곧바로 자기 처지를 여기에 겹칩니다. 추석을 감옥에서 보내는 것도 이 소외의 특수한 형태라고 씁니다. 저는 이 대목을 가는 사람과 못 가는 사람이 같은 구조 안에 있다는 말로 받아들였습니다.
추석을 감옥에서 보내는 아들의 셈법
몇 해 전 추석 무렵에는 부모님이 면회를 다녀가시면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자네가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하는 건데…, 불효일세.
저자는 이렇게 받아들입니다.
명절 세배는 제가 못다하고 있는 숱한 도리 가운데 작은 하나일 뿐임을 명심하고 있습니다.
편지는 이렇게 끝납니다.
저희 방에는 큼직한 동창(東窓)이 있어서 보름달은 물론 산을 오르는 성묘객들의 모습도 잘 보입니다. 이번 추석에는 어머님의 창에도 크고 환한 보름달 둥실 떠오르길 빕니다.
성묘하러 산에 오르는 사람들을 창 너머로 바라보던 사람이 어머님 창에 뜰 달을 빌어 줍니다. 같은 달을 서로 다른 창에서 본다는 대목에서 한참 눈이 머물렀습니다.
한가위 달, 그리고 양말 세 켤레
책에는 더 오래된 추석 편지도 있습니다. 「한가위 달」은 1978년 추석에 아버님께 쓴 짧은 편지인데, 저자는 달이 밝아 시 한 수를 지어 보았다고 합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긴 구름도 붙잡지 못합니다. 차고 이울기를 거듭한다지만 사실은 달 위의 그림자가 그러는 것일 뿐입니다.
달을 올려다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 쓴 시라서인지 오래 남았습니다. 1977년 10월 4일 계수님께 보낸 편지에는 작은 소포가 나옵니다.
양말 세 켤레. 추석이었습니다. 먼저 손에다 신어보았습니다.
양말을 손에 끼워 본다는 대목에서 웃다가 마음이 짠했습니다. 저자는 이어서 설빔 신발을 신고 골목으로 나가고 싶던 마음이 짜릿하게 동한다고 씁니다. 선물 세트 걱정을 하는 요즘, 양말 세 켤레가 그해 추석을 채웠다는 사실을 한동안 들여다보았습니다.
가족 앞에서 이해받고 싶은 마음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붙잡은 대목은 추석 편지보다 귀휴를 다녀온 뒤의 편지였습니다. 1984년 6월 19일 계수님께 쓴 글에서 저자는 귀휴로 나가 있던 엿새 동안 지난 16년의 세월을 살아내야 했다고 씁니다. 가족들의 따뜻한 포용에도 잘 풀리지 않는 갈증이 있었다고요. 그러고는 그 갈증을 이렇게 되짚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귀휴 기간 동안에 내가 힘부쳐 했던 아픔과 갈증은 나 자신의 조급하고 밭은 생각 때문이란 반성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기보다는 사랑받으려 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해받으려 하는’ ‘마음의 가난’에 연유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남에게 자기를 설명하려고 하는 충동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감의 결여를 반증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어차피 나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로 귀착되는 것입니다.
명절에 친척들 앞에서 회사 이야기, 결혼 이야기를 해명하다 진이 빠진 경험은 한 번쯤 있을 겁니다. 저자의 처지와는 무게가 다르지만 이해받으려 애쓰다 지치는 마음의 구조는 통하는 데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찔렸습니다. 명절 뒤에 남는 서운함은 가만 보면 이해받지 못해서일 때가 많았으니까요. 1986년 2월 편지에는 이런 문장도 있습니다.
여러 사람들의 걱정과 수고에 의하여 나의 징역살이가 지탱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징역을 나 혼자 짐지고 있거니 하는 생각은 자만입니다.
짐을 나만 지고 있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하는 문장입니다. 명절에 저는 제 몫만 크게 보고 있지 않았나 돌아보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책을 덮고 나서도 서로 다른 창에 뜬 달이 계속 떠올랐습니다. 가는 사람에게도 못 가는 사람에게도 그 길은 같은 그리움의 일부일 수 있겠구나 싶었습니다. 저자가 멀리서 어머님 창에 뜰 달을 빌었듯이, 같은 보름달 아래 안부를 나누는 것으로도 명절은 이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책을 읽고 저는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 이번 추석에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이 내 주변에 있는가, 있다면 안부는 누가 묻는가
- 가족 앞에서 나를 설명하느라 애쓰기 전에 상대를 먼저 이해해 보려 한 적이 있는가
- 보름달이 뜨는 밤, 멀리 있는 가족에게 문자 한 줄이라도 보내 보았는가
명절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분, 고향에 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궁금했던 분, 짧은 편지글로 사색의 결을 느껴 보고 싶은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다만 한자어가 많은 옛 문장이라 술술 읽히지는 않습니다. 「추석」이나 「한가위 달」처럼 짧은 편지부터 골라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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