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에 스친 15초짜리 영상의 후렴이 점심을 먹고 나서도, 퇴근길에도, 샤워하다가도 머릿속에서 돕니다. 제목도 가수도 모르고 좋아하는 노래도 아닌데 그 여덟 마디만 끝없이 재생됩니다. 저도 그런 날이 꽤 있습니다. 이럴 때 펴볼 만한 책이 올리버 색스의 『뮤지코필리아』입니다. 색스는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를 쓴 신경과 전문의이고 이 책에는 음악 때문에 뇌가 이상하게 굴거나 오히려 놀랍게 버텨내는 사람들의 진료 기록과 독자 편지가 가득합니다.
뇌벌레라는 불청객
색스는 이 현상을 귀벌레, 요즘 말로는 뇌벌레(brainworm)라고 부릅니다. 시작은 대개 광고 음악이나 드라마 주제곡입니다. 듣는 사람을 사로잡도록 만들어진 노래니까요.
음악의 특정 부분이 며칠 동안 머릿속에서 계속 미칠 듯이 울려댄다.
색스의 친구 닉은 텔레비전 쇼 주제곡을 딱 한 번 듣고 거의 열흘을 시달렸습니다. 깡충깡충 뛰어보고, 백까지 세어보고, 얼굴에 물을 끼얹어 봐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학교 일에 지장이 생기고 잠까지 설쳤는데, 나중에는 노래가 반복되다 못해 매력도 의미도 다 잃어버렸다고 하니 웃을 수만은 없는 이야기입니다.
싫어하는 노래도 들러붙는다
취향은 상관이 없습니다. 색스는 엉뚱하거나 시시하거나 심지어 혐오하는 음악인데도 이런 일이 벌어진다고 씁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음악이 자동적으로 또는 강박적으로 마음속에서 반복되는 현상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우리의 뇌가 음악에 민감하게, 때로는 무기력할 정도로 과민하게 반응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제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뇌가 원래 그렇게 생겨 먹었다는 이야기라 조금 안심이 됩니다. 색스도 이유를 하나로 못 박지는 않습니다. 선율의 모양이 마음에 각인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고 거기에 의미와 감정도 끼어든다고 말할 뿐입니다. 다만 시와 발라드, 동요에는 후렴이 있고 우리는 반복에 이끌린다는 대목에서, 숏폼 영상의 후렴이 왜 그렇게 잘 붙는지 짐작이 갔습니다.
음악 폭격에 포위된 시대
색스는 뇌벌레가 예전보다 지금 더 흔하고 눈에 띄는 현상일지 모른다고 짐작합니다. 옛날에는 남의 노래를 들으려면 교회나 가족 모임, 파티에 가야 했는데 음반과 방송, 영화가 나오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끊임없이 울려대는 음악 폭격에 포위된 상태다.
이 책이 쓰일 때만 해도 아이팟 시절이었는데, 지금은 그 자리를 스트리밍과 숏폼이 차지했습니다. 식당, 카페, 헬스장에서 줄곧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더하면 색스의 표현이 오히려 더 실감납니다.
음악은 몸부터 움직인다
색스는 노르웨이에서 산을 오르다 다리 힘줄이 찢어진 적이 있습니다. 다리를 쓸 수 없는 채로 해가 지기 전에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는 행진곡과 뱃노래를 부르며 박자를 타고 몸을 밀어 내려왔습니다.
몸 전체를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박자에 맞춰 음악에 몸을 맡겼다.
파킨슨병 환자에게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됩니다. 책은 파킨슨병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음악이 확고한 리듬을 갖추면 충분하고 굳이 친숙하거나 정서적일 필요는 없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음악이 멈추면 동작도 함께 멈춘다고 하니, 음악이 병을 고친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억이 다 사라져도 노래는 남는다
이 책에서 가장 오래 남은 장면은 알츠하이머를 앓는 우디의 이야기입니다. 우디는 40년 동안 아카펠라 그룹에서 바리톤을 맡았습니다. 딸 메리 엘런은 색스에게 아버지의 상태를 이렇게 전합니다.
자신이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지금 어디에 사는지, 10분 전에 무엇을 했는지도 아버지는 전혀 모릅니다. 모든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음악만 빼고 말입니다.
공연 날 저녁에 타이를 맬 줄 몰랐고 무대에 오르다 길을 잃기도 했는데, 노래는 완벽했다고 합니다. 55년을 함께한 아내 로즈메리는 남편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아 늘 지쳐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노래하는 순간만큼은 슬프지 않았고 미망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약이라 부르기 전에
색스는 음악을 만병통치약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심한 기억상실을 앓는 환자에게 날짜를 노래로 만들어 불러주었지만 그 정보가 일상의 기억으로 이어졌다는 증거는 끝내 찾지 못했다고 솔직히 적습니다. 그럼에도 노래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노래가 남기는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노래를 부름으로써 조성되는 분위기는 한동안 지속될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1~2분 만에 없어지기도 하는, 자신이 노래를 불렀다는 기억보다 오래 지속된다.
노래를 불렀다는 사실은 잊어도 그때의 기분은 남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색스는 치매 환자에게 음악이 이렇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음악은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며, 적어도 잠시나마 그들에게 본연의 모습을 되찾게 해주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마무리하며
이 책 속 음악은 취향의 문제이기 전에 뇌와 몸에 깊이 박힌 무언가입니다. 색스는 음악이 어디에나 있어서 오히려 일상에서 하찮게 여겨진다고도 썼습니다. 책을 덮고 저는 이런 질문을 해봤습니다.
- 요즘 머릿속에서 계속 도는 노래에는 어떤 기억이나 감정이 붙어 있는가
- 부모님이나 조부모님이 젊을 때 즐겨 부르던 노래를 나는 알고 있는가
- 명절이든 안부 전화든, 그 노래를 한 곡만 같이 들어보면 어떨까
숏폼 후렴이 왜 이렇게 안 떠나는지 궁금했던 분, 기억이 흐려지는 가족을 곁에서 지켜보는 분, 뇌과학 책이 어렵다고 느꼈는데 사람 이야기로 읽고 싶은 분께 이 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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