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앞두고 벌써 마음이 무겁다는 사람들이 있다.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어김없이 도는 통계가 있다. 명절 연휴 동안 가정폭력과 교제폭력으로 인한 112 신고가 평소보다 60% 가까이 늘어난다는 경찰청 자료다. 잔소리 한마디, 비교 한마디에서 시작된 말다툼이 왜 유독 이 며칠 사이에 폭발점까지 치닫는 걸까. 임상심리학자 토니 험프리스는 『가족의 심리학』에서 그 답을 명절이 아니라 우리가 나고 자란 가족, 그 오래된 습관 속에서 찾는다.
시댁과 처가라는 이름의 국경선
험프리스는 건강한 가족에게는 반드시 울타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울타리를 가장 자주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다름 아닌 시부모와 장인장모를 지목한다.
시부모든 장인장모든 아무리 마음씨 좋고 포용력이 있다 해도 기존에 존재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 새로운 가족을 형성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명절날 며느리에게 김치가 왜 이렇게 짜냐, 사위는 왜 저렇게 말이 없냐는 한마디가 그저 지나가는 잔소리로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새로 꾸린 가족의 경계를 슬쩍 넘어서는 순간, 그 말은 참견이 아니라 침범이 된다.
착한 며느리, 착한 사위라는 오래된 조건
험프리스가 가장 위험하다고 짚는 가족은 사랑에 조건을 다는 가족이다. 이 조건은 대개 어릴 적 "착한 아이가 되어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착한 아이가 되어라.’라고 늘 되뇌는 부모가 많은데, 그것도 가족이 내세우는 ‘사랑의 조건’이다.
이 조건은 자라서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어른이 되어서도 ‘남들 눈치 보는 아이’로 남는다. 명절 밥상에서 애써 웃으며 넘기고 돌아서서 혼자 억울해하는 얼굴에는, 어릴 적 그 조건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잔소리는 사랑이 아니라 방어다
명절 잔소리를 단순한 애정 표현으로 넘기기엔, 험프리스가 분석하는 잔소리의 속내가 전혀 다르다.
잔소리하는 사람은 모든 책임을 줄기차게 남의 탓으로 돌려 창피와 열등감을 줌으로써 자신을 보호한다. 상대방을 깔아뭉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취업은 언제 하니, 결혼은 언제 하니 하는 말이 매년 되풀이되는 것은 상대가 걱정돼서만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 자신의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방식일 수 있다.
갈등은 꺼야 할 불이 아니라 읽어야 할 신호
그렇다고 험프리스가 갈등 자체를 피하라고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반대다.
가족 내에 갈등이 있다는 것은 어떤 장벽이 가족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신호다. 그런 신호를 유념하면 가족은 화합할 수 있다.
그는 갈등을 푸는 7단계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데, 세 번째 단계인 브레인스토밍에서는 이렇게 못박는다.
만약 사위나 며느리, 시부모나 장인장모 등 ‘외부인’과 같이 산다면 그들도 가족회의에 참석시켜야 한다.
명절 상 앞에서 어른들만 의사결정을 하고 며느리와 사위는 그 결정을 전달받기만 한다면, 갈등은 해결되지 않고 다음 명절로 미뤄질 뿐이다.
떠나야 다시 사랑할 수 있다
11장에서 험프리스는 결혼한 자녀와 부모 사이의 갈등을 다루면서 오래된 문구 하나를 다시 꺼내든다.
‘사랑은 눈을 감게 만들지만 결혼은 눈을 뜨게 만든다.’는 옛 선현들의 지혜를 다시 한 번 곱씹어봐야 한다.
그가 상담했던 사례를 보면 시부모 역시 일방적인 가해자는 아니었다.
시부모들도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느라 불편을 겪었다. 자신들의 집 안을 꾸미는 취향이나 살림하는 방식, 생각이나 의견이 며느리에게 평가받는다는 생각이 들어 불안했다.
며느리도, 시부모도 결국 같은 불안 속에서 서로의 영역을 건드리고 있었던 셈이다. 누가 더 무례했느냐를 따지기 전에, 두 가족은 아직 정서적으로 분리되지 못했다.
명절 밥상에서 필요한 건 정답이 아니라 듣기
험프리스가 건강한 가족의 대화법에서 가장 먼저 꼽는 것은 말하는 기술이 아니라 듣는 기술이다.
듣기는 소통의 시작이다.
명절에 가장 많이 오가는 말은 조언과 평가다. 그가 강조하는 방향은 그 반대에 가깝다.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들어주기. 갈등을 키우지 않는 방법 중에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실천하기 어렵다.
맺는 말
올해 추석, 상 앞에서 튀어나올 법한 말 한마디를 미리 떠올려보면 어떨까. 그 말이 정말 상대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의 오래된 불안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말인지 한 번 더 물어보는 것. 그 질문 하나가 매년 되풀이되는 명절 갈등의 각본을 바꾸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심리·마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성공한 사람들은 왜 격무에도 스트레스가 없을까』, 야근보다 사람이 더 지치게 만든다는 증거 (0) | 2026.09.17 |
|---|---|
| 『이 모든 걸 처음부터 알았더라면』 - 사랑 앞에서 망설이는 우리에게 (11) | 2025.05.25 |
| 『결심만 하는 당신에게』 - ADHD와 현대인의 주의력 결핌 문제 해결 (14) | 2025.05.24 |
| 『걱정에 대하여』 - 왜 이렇게 걱정 되지? (13) | 2025.05.22 |
| 『진화심리학』 - 왜 우리는 그런 선택을 할까? (18) | 2025.05.15 |